윤탐 장편소설 『TRICK OR TRIP』 45화(完)

3부 「천형(天刑)」

by 윤아무개

설마, 설마 죽지는 않았겠지? 걱정되면 뭐라도 해 봐. 다시 가? 돌았냐? 쉴 새 없이 지껄이는 대갈통을 마구 때렸다. 식은땀이 나고 오한이 들었다. 피부 밑으로 수천마리의 벌레가 지나다니는 듯하고 눈알이 터질 것 같았다. 기차 좌석에 웅크린 채로 신열을 앓았다. 옆자리 승객이 귀에서 빨간 이어폰을 빼며 괜찮으냐고 물어왔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어폰을 끼고 다른 자리로 옮겨 앉았다.

종점까지 가는 기차표를 끊었지만 도중에 내려버렸다. 플랫폼에 발을 딛자마자 달려가 맞은편 선로에 구토를 했다. 행인들의 야유가 들려왔다. “선생님, 괜찮으세요?” 점잖게 생긴 한 역무원이 다가와 물었다. 나는 괜찮다고 했다.

“안색이 너무 창백하세요.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입가를 닦았다. 무진장 빠르게 뛰는 심장 때문에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기분 정말 죽이, 아니, 어떤 정신 나간 인간이 죽인다는 말을 감탄사로 만든 거죠?”

“네?”

점잖은 얼굴 위로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나는 정신없이 빠르게 지껄였다.

“아마아주아주옛날사람들이그런말을썼겠죠?인간은아직도야만적이라혀와손,모든감각기관에전부를걸죠.문명이인간을구원할수있을까요? 아, ……죄송해요. 혼자 갈 수 있습니다.”

입에서 침이 질질 샜다. 힘겹게 플랫폼을 걸었다. 뭘 말하고 싶은 거야? 감각으로부터의 구원? 감각의 선악? 웃기는 소리. 세상이 두 동강 나고 있었다.

기분 나쁘고 무서운 착란들.

눈을 뜬 곳은 역사 내 화장실이었다. 좌변기에 앉아 땀에 절어 있었다. 앰뷸런스. 119.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살아있을까? 비틀거리며 칸막이 문을 열고 세면대에서 얼굴을 씻었다. 군데군데 터진 주먹이 퉁퉁 부어 있었다. 거울을 보았다. 창백한 얼굴, 붉은 눈가. 피 묻은 옷. 산장을 뛰쳐나가기 직전, 나는 N을 불렀다. “경찰이 셜록 사무실을 덮쳤대. 애들 두 명은 벌써 잡혔고 셜록도 언제 잡혀갈지 몰라.” 그리고 셜록과 만났던 치킨집 주소를 알려주었다. N은 피 범벅인 얼굴로 소름끼치게 미소 지었다. 나는 도망쳤다. 친구를 위한 마지막 도움이자 나의 새로운 삶을 위한 처단이었다.

거울 속 창백한 얼굴을 노려보았다. 아닌가.

피떡이 된 N을 끌고 원탁이 있는 방으로 향했다. 흰 제단 위에 그를 내던진다. 피로 젖어드는 테이블보. 불분명한 발음으로 나를 찾는 N. 나는 방 한구석에 놓인 휘발유통의 뚜껑을 연다. N과 그의 전리품 위에 휘발유를 한껏 뿌리고, 집안 곳곳에도 뿌린 뒤 통로를 지나 마당에까지 기름으로 길을 낸다. 벽 너머 들려오는 N의 신음소리. 라이터로 명함에 불을 붙인 뒤 떨어뜨린다. 기억해? 이 집에 보일러를 안 놓은 이유. 기름을 따라 번지는 불. 산장을 삼키는 불길, 화염.

찬물로 얼굴을 씻어냈다. 아니다. 나는 자해하는 N을 두고 도망쳤다. 그래. 기차 안에서도 내내 뒤엉키던 기억과 환각. 둘 중 하나는 기억이고 다른 하나는 망상인데 분간이 되질 않았다. 넋을 놓은 채 젖은 손으로 옷에 묻은 핏자국을 문질렀다.

정신을 차리고 몸이 진정될 때까지 역전 광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마음의 처연함이 발작할 힘마저 빼놨을 때는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였다. 지친 몸을 끌고 길 건너 의류 브랜드 매장에 들어갔다. 말끔한 남방셔츠 한 벌과 슬랙스 한 벌을 샀다. 계산대 직원이 태그를 자를까 물었고 나는 그렇게 해 달라한 뒤, 혹시 가위를 한번 빌릴 수 있겠냐고 물었다. 직원이 태그를 자르더니 선뜻 가위를 내밀었다. 나는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냈다. 영어로 적힌 N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한번 훑고, 다른 생각이 틈타기 전에 가위로 잘라냈다.

역전 목욕탕에 들러 몸을 씻었다. 헤어드라이어로 머리를 말리고 비치된 스킨과 로션을 얼굴에 발랐다. 말끔한 옷으로 갈아입고 근처 무인세탁소로 향했다. 울음을 참는 듯한 처연한 침묵이 내 안에 수면처럼 찰랑였다. 한밤의 무인세탁소는 아무도 없어 고요했다. 더러워진 옷들을 세탁기에 넣었다. 소파에 앉아 옷들이 세제 물에 엎치락뒤치락하는 광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더럽게 지루하고 이상하게 평화로운 광경. 세탁소 벽에 걸린 TV에는 당구 중계가 한창이었다. 당구장에 종종 놀러갔던 고등학생 때가 떠올랐다. 사구를 잘 치던 녀석이 페르마였는지 왓슨이었는지 문니였는지 헷갈렸다. 모두 잘 쳤을 수도. 나는 포켓볼만 칠 줄 알았다. 공이 홀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쾌감을 버릴 수 없지. 사구를 치자는 녀석들에게 나는 그렇게 대꾸하곤 했었다. 중계 화면 속 당구대에는 흰 공 하나와 노란공 하나, 빨간 공 둘이 서로 부딪치고 부딪치며 사라지지도 않고 한 판에서 계속 뒹굴었다. 속이 좋지 않았다.

다시 기차에 몸을 싣고 향한 곳은 F시였다. 하동의 여전한 풍경 속에 발을 내딛었다. 늦여름 밤의 냄새와 가로등 아래 꼬이는 날벌레들. 아파트 근처에서 담배 한 대를 피우고, 한 대를 더 피우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집에 돌아갈 수 없었다. 지금 들어가면 영영 혼자 설 수 없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치심과 자괴감에 휩싸인 채 기차역으로 되돌아가며 휴대폰을 꺼냈다.


요한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나를 자취방으로 들였다. 비좁은 옥탑이라 본인이 되레 미안하다고 했다. 짐을 두고 새벽까지 장사하는 식당에 들러 함께 돼지국밥을 먹었다. 별 대화는 오가지 않았다. TV를 건너다보던 사장이 턱을 괸 채 살짝 졸았다. 나는 불현듯 요한이 내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전에는 미안했다고, 서규찬이 아니라 원래 이름 그대로라고 밝혔다.

“개명했나 했었어. 나처럼.”

요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국밥을 또 한술 떴다. 왜 규찬이라는 이름을 썼는지도 묻지 않았다. 우리는 사이다를 주문해 한 잔씩 따르고 잘 지내보자며 건배했다.

요한도 봉사만 하며 살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도 하고 계약직으로도 일하고, 가끔은 막일도 한다고 했다. 나는 N을 추적한다고 모아뒀던 돈을 계산했다. 아껴 쓴다면 두어 달치 월세와 생활비는 나올 것 같았다. 요한의 소개로 교회 집사가 운영하는 식당에서 청소 아르바이트도 시작할 수 있었다. 매일 의자를 뒤집어 식탁에 올리고 타일바닥을 걸레질했다. 성실하게 힘주어 닦다 보면 삶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기분이 들곤 했다. 매일 요한보다 일찍 자취방에 돌아와 청소하고 노트북을 켰다. 구직 사이트를 살피면서 이력서를 써 보려 했지만 도통 뭘 써야 할지 감을 잡지 못한 채 시간만 보냈다. 평생 뭐하면서 살아왔나. 그런 생각이 칸칸이 공백을 남겼다.


모든 상황이 툭 잘린 것은 아니다.


심각한 금단현상과 후유증이 온몸을 찢어발겼다. 환각과 오한, 발열, 착란, 공황장애와 심각한 불안증이 잇따랐다. 지하실에서의 끔찍한 소음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울려 혼절하기도 했다. 기차에서의 환각 역시 반복됐다. 지금까지도 경찰이 오지 않은 걸 보면 불을 지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호수에서의 일처럼 내가 저질러 놓고 잊어버렸다면 어떡하지? 불안감에 자주 손톱을 물어뜯었고, 그러다 어느새 손등을 물어뜯기도 했다.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요한이 정성껏 돌봐줬다. 마약 중독은 의지만으로 해결할 수 없었다. 전문가의 도움 없이는 힘들겠다며 중독재활센터를 연결시켜준 것도 요한과 전도사님이었다. 나 역시 일찌감치 치료를 받고 싶었지만 약물에 대한 법적 책임을 지게 될까 두려웠다. 그러나 두려움이고 나발이고 금단증상으로 제정신을 못 차릴 지경에 이르렀을 때 요한과 전도사님께 모든 것을 일임했다. 그들의 배려인지 중독재활센터의 시스템인지 모르겠으나 치료는 조용히 이뤄졌고 나도 그 이상은 캐묻지 않았다.


누구에게나 시간은 흐른다. 마약중독자에게 가난은 마약이나 목숨, 둘 중 하나를 끊으라고 강요한다. 나는 다행히 약을 끊었다. 하지만 금단증상이 사라질 때까지 술을 너무 퍼마셔댔다. 돈이 없으니 잘 먹지도 못하는 소주를 마셔댔다. 요한 옆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어 길에서 마셨고, 길바닥에 퍼질러 자는 날이 숱했다.

“힘들게 번 돈을 술담배로 다 날릴 거야?”

요한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그럴 때마다 내 곁에 N이 아니라 요한이 있다는 것을 실감하고 안도했다. 한편으로 두려워하면서. 네 옆에 있는 사람들은 다 널 떠나거나 망가졌지. 나는 요한이 어느 쪽에도 해당되지 않기를 바랐지만, 불가피하다면 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기 전에 내가 떠나고 싶었다. 밤마다 요한은 좁은 자취방 한쪽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모두에게 평안을 바라는 기도. 그리고 모든 것이 당신의 뜻인 줄 아나 가능하다면 자신을 구원하지 말아달라는 기도. 낮고 간절한 목소리를 등진 채 나는 잠에 들려 애쓰곤 했다.

금단증상이 가라앉고, 더 이상 어떤 증세도 보이지 않은 채 반년이 지났다. 그맘때 드디어 작은 스타트업 회사에 입사하는 경사가 겹쳤다. 전도사님은 요한과 나를 불러 교회 집사님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작은 파티를 열어줬다. 첫 월급을 타고는 내가 그들을 대접했다. 감사한 마음이 컸다. 부른 배를 뿌듯해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함께 걷던 요한이 난데없는 말을 꺼냈다.

“너 혹시 N이라고, 중학교 삼 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 왔던 애 기억해?”

심장이 신발 밑창까지 떨어졌다가 튀어 올라온 기분이었다. 태연한 척 요한을 돌아봤다.

“기억하지. 왜?”

“아니, 작년인가 재작년인가 전도사님이 교회 중등부에 새로 온 애가 있다면서, 나보고 걔랑 대화를 해 보면 좋겠다고 하셨거든. 상담해 주듯이. 잠깐 만나 봤는데 그 애 말하는 거나 행동하는 거나 꼭 N 보는 것 같더라. 가끔 생각이 나서.”

“어땠는데?”

“글쎄,” 요한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자기 생각 확실하고, 지 잘난 거 알고, 모든 것을 의심하고, 세상 깔보고, 돼먹지 않은 세상에 자신은 절대 지지 않을 거라고 믿고. 모르겠다. 하나하나 말하자면 너무 많아.”

“그맘때 애들이야 다 그렇지 뭐. 우리도 그랬을걸.”

“그런가. 그래도 유별나게 눈에 띄는 애들 있잖아.” 요한이 웃었다.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나 역시 그랬다. 겁쟁이인 주제에 자신만만했고 세상에 절대 지지 않을 거라 자신했다. 종종 N과 만나지 않았다면 N과 나의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상상해보곤 했다. 좋은 쪽이든 안 좋은 쪽이든 구체적이고 생생하게 상상했지만, 그것은 아무래도 쓸데없는 짓이었다. N을 떠올리면 수많은 말이 떠오르고, 또 수많은 수식어가 필요한 녀석이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변명이 아니라 설명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변명은 자기방어지만 설명은 자기확신이다. 나는 그것을 오래전부터 부러워했다. 마지막으로 N의 이름을 본 것은 식당 청소 아르바이트를 한 지 석 달쯤 지났을 때였다. 월급 입금을 확인하려 은행 어플을 켰다가 눈이 휘둥그레져 거래내역을 확인했다. 월급 말고도 일억 원이 더 입금된 내역이 있었다. N이었다. 100,000,000. 숫자를 손가락으로 훑었다. 살아있구나. 안도감이 밀려왔다. N이 보낸 돈은 그 후로 단 한 푼도 쓰지 않았다. 요한과 나는 밤바람을 쐬며 천천히 걸었다. 언젠가는 펜션 사건의 진상에 대해 묻고 싶은 적도 있었지만 이제 그런 것은 상관없는 일이었다. 미궁은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과거의 미궁을 해결하려는 마음에도 큰 의지가 필요하지만, 그러기를 단념하는 것 역시 숭고한 의지를 지녀야 한다.

입사한 지 일 년이 지나고 내 밑으로 후배도 한 명 생겼다. 밤톨처럼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에 단단한 인상을 가진 녀석이었는데 생각보다 귀여운 면도 있었다. 사수는 나보다 나이가 어렸다. 회사 방침에 따라 스스럼없이 날 대하는 듯했지만 초반에는 꽤나 멋쩍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사람이 좋고 유능한 선배라 많이 배우며 일했다. 지난했던 과거를 생각하면 이래도 되나 싶을 만큼 나는 인복이 좋았다.

가끔 이들과 술을 마시면 밤톨이 자주 운다. 정말 서럽게 울어대면서도 이유는 설명하는 법이 없었다. 한날은 흐느끼다 테이블에 머리를 꼬라박은 그를 두고 선배가 밤톨의 누나가 아프다고, 최근에 병세가 더 안 좋아졌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했다.

“속이 많이 상하겠네요.” 내가 말했다.

선배는 밤톨의 누나와 절친한 사이라고 했다. 고등학교 동창으로 몇 년 전에는 해외여행도 함께 다녀왔다고 했다. 친구가 아프다는 것을 알고 밤톨에게 자기가 다니는 회사에 채용공고가 떴으니 지원해 보라고 연락한 것도 선배였다.

“그렇다고 채용 과정에 개입했던 건 아니고요.”

“그럼요, 알죠.”

알다마다. 선배가 어떤 사람인데.

어떤 사람인데?

환청 같은 목소리가 뇌를 울린다. 소주를 한잔 따라 마시며 선배를 향해 웃는다. 어떤 사람인지 알아? 이들의 이야기를 믿을 수 있어? 앉아서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도, 그 모든 이야기가 거짓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그들이 날 속일 이유는 없다. 하지만 나도 이유 없이 남들을 속이며 살지 않았나. 빌어먹을 목소리는 신나서 떠든다. 찌는? 요한은 믿을 수 있어? 전도사는? N과의 여행이 남긴 이유 없는 불신과 의심은 일상에서 사사건건 나의 주의를 빼앗고, 시시콜콜한 데 신경을 쓰게 하고, 사람들과의 위태로운 거리감을 갖게 했다. 인간관계에 적당한 거리감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내가 칼을 쥔 손을 뻗고 있기 때문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여느 때와 같던 회사 점심시간, 모두 각자 자리에서 배달시킨 도시락을 먹었다. 선배가 TV 채널을 돌리다 가벼운 탄식을 내뱉었다. 화면을 보지 않고 국을 떠먹던 나는 절벽 근처 산장에서 큰 화재가 일어났다는 앵커의 말에 숟가락을 놓쳤다. 고막을 송곳으로 찔린 듯한 통증과 함께 숨이 막혔다. 뉴스 내용도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다. 몸이 뒤틀렸다.

귀를 삼키는 지하실의 소음.

암전.


종합병원 육인실에서 눈을 떴다. 의사는 안정을 취해야 한다고 말했다. 저녁에 밤톨과 선배가 병문안을 왔다. 그들은 내가 거품을 물고 쓰러지더라고 했다. 그간 나를 떠났던 증세들이 한꺼번에 덮쳐온 듯했다. 선배가 잠시 전화를 받으러 간 사이 밤톨이 내 옆에 앉아 울먹거렸다.

“너 울면 다시는 출근 안 한다.”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요?” 밤톨이 찡찡거렸다. “우리 누나도 여기 입원해있어요.”

안 그래도 선배한테 들었다고 위로를 전하려는 찰나, 밤톨이 말을 가로챘다.

“제가 철딱서니 없어 보여도 아무한테나 가족 얘기 안 털어놔요. 형이니까 술 마시면서 누나 얘기도 한 거지. 진짜 친형 생긴 거 같아서 얼마나 좋았는데……. 아프지 좀 마요.”

멍하니 밤톨을 쳐다봤다. 나한테 직접 얘기를 했었다고? 그의 팔을 토닥였다. 그래, 그랬던 것도 같다. 그에게 알겠다고, 고맙다고 웃어줬다. 끝내 밤톨이 엉엉 울기 시작했다.

“울면 출근 안 한다니까.” 내가 당황하며 그를 달랬다.

“형, 근데 저 퇴사할지도 몰라요. 아르바이트랑 공무원 시험 준비하면서 누나 돌보려고요.” 밤톨이 눈물을 닦았다. “퇴사하면 진짜 편하게 대할 거예요. 연락도 자주 하고. 괜찮죠?”

“그래. 자주 연락하면 되지. 나중에 한잔하자.”

“술은 무슨. 빨리 낫기나 해요.” 밤톨이 훌쩍이며 웃었다.

선배와 밤톨이 돌아가고, 병원 침대에 누워 한참 생각에 잠겼다. 질문은 내 평생 뒤늦게 따라왔다. 주변사람들을 돌아보지도, 알려고 들지도 않았다. 그들이 나를 챙기려고 해 줄 때조차 등한시했다. 어쩌면 나를 떠난 모두가 미리 예고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관계의 파국이 있기 전에, 삶이 의도치 않은 방향으로 흐르기 전에 그것을 막을 순간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내 곁에서 온몸으로 예언한 그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모든 것을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그러나 알아차렸다면 바뀌었을까?

아니, 바뀌지 않았을 것이다. 내 인생을 망친 것은 N이 아니다. N과의 여행도 아니다. 언제나 파국을 기대하고, 적극적으로 파멸을 찾아 나선 나의 욕망이 내 삶을 망가뜨렸다. 인생이라는 거대한 문제 앞에서 나는 늘 도망치려 했다. 간혹 문제에 맞서 맨몸으로 달려들 때도 있었지만, 그때조차 문제를 해결하거나 이겨내기 위함이 아니라 차라리 한시 빨리 망가져 버리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망가져야만 그 어떤 책임도 피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 내게 내재되어 있는 회피에의 욕망도 실패에의 욕망도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외면한다고 욕망이 사라지길 바라는 것은 허황한 기대다.

파멸에의 매혹.

자기 파괴의 욕망.

밤늦게 요한이 이온음료를 들고 찾아왔다. 내일이면 퇴원하는데 뭘 굳이 오냐고 하니 요한이 그런 소리 말라며 나무랐다. 함께 복도로 나섰다. 조명들 일부를 꺼둔 심야의 병원은 적막에 묘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우리는 빈 장의자에 앉아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사회생활 안 힘드냐?” 내가 물었다. “사람들이 곱게 보지 않을 텐데.”

“어쩔 수 없지 뭐. 저지른 짓이 있는데.”

“가만 보면 참 대단해. 난 깽판치고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던데.”

“나도 그래.”

“어떻게 참냐?”

“넌 안 참냐?” 요한이 웃었고 나도 따라 웃었다. 웃음이 가시자 그가 말을 이었다. “인간 대우 못 받아도 싸다고, 스스로 자주 상기 시키지.”

“넌 사람답게 살고 있어. 네 덕에 나도 마음 다잡은 거야.”

“그러냐?” 요한이 미소를 지었다. 미소는 곧 씁쓸하게 가라앉았다. “근데 가끔은, 아주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해. 아주 견디기 힘들 땐.”

“무슨 생각?”

요한이 복도를 둘러봤다. 아주 찰나였지만 병원의 적막이 순간 스산하게 느껴졌다.

“저 새끼 내가 죽일 수도 있는데. 난 사람 죽여 봤으니까, 하나쯤 더 죽이는 건 일도 아닌데.” 요한이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생각을 하면 오히려 마음이 편해져. 왜 그런지는 몰라. 봐준다고 생각하는 건지, 이상하게 너그러워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아주 가끔이야.” 요한이 일어났다. “간다. 내일 집에서 보자.”

“그래. 조심히 들어가.”

어두운 복도를 걸어가는 요한의 뒷모습을 지켜보며, 나의 삶을 추동하는 힘에 대해 생각했다. 화재가 난 산장. 지금 생각하면 아닐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때는 N의 산장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이 발작의 이유는 아니었다. 도심 한가운데 잘 서 있던 빌딩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려 폐허가 되듯, 뉴스를 듣는 순간 나도 몰랐던 기대가 마음속에서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남몰래 늘 이런 기대를 해왔을지 모른다. 어느 날 예고도 없이 비행기 티켓이 날아올지도 모른다고. 집 앞에 N이 외제차를 대놓고 기다릴지도 모른다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웃으며 다시 한번 여행을 권할지 모른다고. 그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릴지 수도 없이 상상하며 모종의 쾌감을 느꼈으리라.

나를 구걸하는 N을 보는 쾌감.

다시 한번 망가질 수 있다는 쾌감.

N과 함께한 여행이 그리웠다. 미치도록.

방랑과 방탕을 향한 그리움, 파멸에의 매혹이 내가 평생을 안고 살아야 할 천형(天刑)이다.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내면의 모습들, 그러나 외면하고 있던 사이 너무나 거대해진 그 기대가 뉴스를 듣는 순간 한꺼번에 무너져 내렸다. 직후 내면의 공허를 견딜 수 없던 정신과 몸이 발작을 일으킨 게 아닐까.

병실로 돌아가 조용히 침대에 눕는다. 하얀 타일을 이어붙인 천장을 보며 나 자신을 시험한다. 쓰고 싶지 않았고 써서도 안 될 것 같아 손도 안 댔던 일억 원. 그러나 이제는 N만큼이나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투명한 나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래. 만에 하나 N이 돌아왔을 때 조금이나마 나은 형편에서 여행하려 묶어 뒀을지 모를 그 돈. 그 돈을 불려 나를 친형처럼 의지한다는 밤톨과 여행할 수 있을까? N이 내게 했던 것처럼, 밤톨을 나의 지배하에 두고 즐길 수 있을까. 깍지 낀 손으로 뒤통수를 받치고 밤톨과의 여행을 상상한다. 누나를 생각하며 안 된다고 하는 밤톨, 짧게라도 좋으니 일단 가 보자고 설득하는 나, 누나의 치료비는 내가 댈게, 그 말에 밤톨이 지을 표정. 그렇게 한 장면 한 장면 상상하는 동안 내 얼굴엔 슬프고도 황홀한 미소가 그려진다. 이상하게 마음이 저릿하고도 공허하고 평온해져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싼다. 오래전 절친했던 친구가 한 말이 있다. 아포리즘은 복잡한 세상을 단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산물이라고. 그러나 세상은 단 한 마디로 정의내릴 수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좀 더 많은 문장을 필요로 한다.

나는 아직도 망가지고 싶다. 그렇지만, 생각을 접고 일단 모로 눕는다。



<끝>




저의 장편소설 『TRICK OR TRIP』을 끝까지 함께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좋겠습니다. 조만간 후기로 찾아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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