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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Sep 13. 2023

플루리움 저녁 뉴스

플루리움 저녁 늬우스

  ‘오늘 저녁 뉴스는 뭐야?’ 퇴근 후 집에 들어서며 아내에게 하는 말이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구순이 지난 장인어른에게 오늘은 또 어떤 일이 있었냐고 묻는 것이다. 기다렸다는 듯 아내의 하소연이 시작된다. 어제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내용이지만 계속되는 것이 걱정스럽다. 코로나 방역으로 인한 제반 규제가 해제된 후 장인어른의 하루는 마치 가뭄 끝에 단비 만난 농부와 같다. 하기야 엄중한 코로나 시국 하에서도 매일 서울 나들이를 하신 양반이니 방역 정책까지 완화된 마당에 더 망설일 것도 없다. 동네 골프용품점을 드나들며 골프 장비를 하나둘 사들일 때만 하더라도 유일한 운동인 골프를 위한 지출이니 비싸긴 해도 이해할만했다. 또 화랑과 미술품 경매장을 드나들며 하나둘 소품을 사면서부터 가끔 장모님과 가벼운 실랑이도 있었으나 그래도 수입 범위를 초과하지 않았기에 넘어갈 만했다.   

   

  그러다 얼마 전부터 백화점을 출입하면서부터 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백화점 출입 빈도에 따라 소비가 늘어남에 급기야 수입을 초과하는 경우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지출을 가능하게 한 것은 십여 년 전 본인 소유의 3층짜리 상가 건물을 처분한 돈을 전부 금융기관에 맡기고 생존하는 동안 매월 통장으로 입금되는 연금 덕분이다. 중견기업 하급 간부 급여 수준의 금액으로 주위의 권유에 따른 일이었다. 잘한 일이었고 화랑 출입을 하기 전까지는 아무런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러다 그림이 점점 늘어나고 백화점으로 활동 영역이 넓어지며 문제가 생겼다. 본인 통장에 입금되는 액수보다 지출액이 간혹 초과하는 것이다. 판단력, 기억력 등이 예전 같지 않기에 남은 할부금 잔액을 가늠하지 못하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보면 참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갑에 있는 카드를 꺼내기까지에는 분명 백화점의 수준 높은 고객 맞춤형 서비스 즉, 신상이 들어오면 구순이 넘은 고객에게까지 빠짐없이 ‘신상 입하’라는 문자를 보내 구매 욕구를 충동질하는 백화점 측의 마케팅 전략도 한몫했으리라. 또 회장님, 회장님이란 극존칭에 아리따운 매장 여직원의 살갑고 극진한 대우를 받는 일은 집에서는 결코 누릴 수 없기에 서울에 가기만 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발걸음이 저절로 백화점으로 향했고 마누라와 딸년의 신신당부 따윈 안중에 없다.     


  우연히 지난달 관리비가 연체된 사실에 아내는 매우 놀랐다. 관리비의 열 배가 넘는 돈을 매달 관리비가 나가는 통장으로 연금을 받는데 잔액이 부족하다는 사실을 처음엔 믿기 어려웠을 것이다. 누구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은 다음에야 부족할 리 없다고 생각했으나 카드 사용명세서를 살펴본 후 영감님의 무절제한 카드 사용 때문임을 확인한 아내의 근심과 불안은 커지기 시작했다. 나름 바로 잡고자 애써봐도 효과가 없고 마땅한 대책도 없기에 내게 푸념과 하소연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정작 마나님과 딸의 태산 같은 걱정을 불러일으킨 장본인은 다음 달 돈이 들어오면 해결된다며 태평하시다. 


  일 년 전부터 매일 들린 곳이 인사동 화랑이고 주인 영감의 권유로 고서화 경매장을 출입한다고 듣고 있었다. 처음엔 영감님의 고상한 취미쯤으로 여겨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미술품에 대한 안목을 키울 수 있을 것이고 작은 그림 한두 점 들고 오시는 모습이 좋아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한두 점 사 오시는 그림의 크기가 점점 커지고 고서화에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그림값이 만만치 않아 보이는 유명 작가의 그림도 있었다. 마침내 장모님의 잔소리와 제재가 시작되었고 그로 인한 두 분간에 언쟁도 잦아지고 아내도 이에 가세하였다. 당신께선 뒤늦게 깨우친 고미술품에 대한 남다른 안목과 예술적 감성을 몰라주는 마누라와 딸년이 그저 야속하기만 할 따름이었다. 한겨울 보일러 트는 것도 아끼며 평생을 알뜰살뜰 살림해 오신 장모님은 그깟 낡아빠진 그림에 무슨 돈을 펑펑 쓰냐며 차라리 맛난 거나 사 먹고 좋은데 구경이나 할 것이지 하는 주장이다. 그런데도 장인어른의 고미술품에 대한 애정과 불타는 지적 욕구는 식을 줄 몰랐고 두 분간의 언쟁도 끊이지 않았다.     


  저녁마다 아내의 푸념과 하소연을 시작된 게 그 무렵부터다. 주된 내용이 장인어른의 씀씀이에 관한 얘기였다. 여생을 엄마랑 맛있는 것 드시고 함께 좋은 구경이나 다니시길 바랐으나, 그놈의 화랑 영감태기의 꾐과 여우 같은 백화점 여직원의 홀림에 넘어가 엄마는 뒷전이고 그림, 옷, 신발 사는 데 정신이 팔려있으니 딸로선 그런 아버지의 처신이 안타깝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다. 몇 번을 잔소리와 신신당부도 해보았으나 도무지 나아지지 않는다며 이를 어쩌면 좋으냐고 하소연한다. 그 이후 귀가하면 내가 먼저 묻는다. '오늘 저녁 뉴스는 뭐야?’ 쏟아지는 아내의 푸념과 하소연을 다 들은 뒤 아내에게 말한다. 그 연세에 건강하신 것만 해도 어디냐. 그 연세의 노인 대부분이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있고 지금 쓰는 돈만큼 병원에 갖다주고 있지 않으냐? 그냥 본인이 하는 대로 두고 한 번씩 살펴보는 정도로 하라고 한다. 아내는 수긍하면서도 아쉬움을 떨치지 못한다. 최근 백화점 출입과 함께 화랑 영감님의 딸이 하는 빈티지 가게도 다니는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쉰다.     


  졸수(卒壽)를 넘어 백수(白壽)를 앞두신 장인어른이다. 그 연세에 건강을 잘 유지하시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본인의 의도와는 달리 아내와 딸에게 걱정을 끼치고 있으나 이 또한 건강하기에 가능한 일이다. 얼마 전 아파트 이름을 플루리움(Plurium)으로 바뀌었다. 라틴어로 ‘더 많은’ 뜻이라 한다. 얼마 남지 않은 생을 더 많은 걱정과 더 큰 근심거리가 아니라, 더 많은 기쁨과 더 많은 즐거움을 아내와 딸에게 선물해 주는 그런 삶을 누려주시길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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