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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Oct 02. 2023

사랑하는 남의 할아버지♪♬

Happy birthday to...


  딸과 아들의 생일이 양력으로 같은 날이다. 음력으로는 일주일 차이가 있다. 생일이 같은 날이다 보니 당사자는 어떠한지 몰라도 부모로서는 편한 점이 더 많았다. 기억하기도 쉽고 매년 두 번이 아닌 한차례만 신경을 쓰면 되었다. 평일인 생일을 지난 주말에 집으로 와 저녁을 함께하자는 딸의 전화를 받았다. 본인 생일 날 남편도 해외출장 기간 중이니 굳이 외식보다 몇 가지 음식을 시키고 집에서 준비하겠다고 아내와 아들과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마 하고 케익은 준비해 가겠다고 했다. 딸과 늘 바쁜 사위의 얼굴을 오랜만에 보는 반가움도 있으나 초등학교 3학년인 손녀를 보는 즐거움이 더 크다.


  방과 후에도 여느 아이들처럼 태권도며 피아노 학원에 다니느라 학년이 올라갈수록 얼굴 보기가 점점 어려워진 손녀다. 하나뿐인 딸자식이라 엄마·아빠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구김살 없이 자랐고, 또 첫 손주라 온 집안 식구들의 사랑도 제 혼자 다 받고 있는 녀석이다. 생일 케이크를 식탁 위에 올려놓고 엄마 머리에 고깔모자를 씌우고 생일 축하 노래를 하는 손녀의 모습을 그려보며 미소를 짓는다. 그런 손녀의 모습을 생각하다 예전 딸이 손녀보다 어렸을 때 있었던 생일 축하 노래에 관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30년도 훌쩍 지난 딸이 취학 전인 예닐곱 살 때의 일이나, 지금 생각해 봐도 그때 딸의 순간적인 기지와 순발력에 웃음을 짓게 된다. 다녔던 회사의 사장님과 장인어른은 외이종 관계의 친척이었다. 비슷한 연배로 대화도 잘 통해서인지 주말이면 부부 동반으로 1박 2일 또는 당일치기 일정의 나들이를 자주 하셨고 때때로 딸을 데리고 다니셨다. 딸도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두 할아버지, 할머니를 싫은 기색 없이 잘 따라다녔다. 어느 일요일, 며칠 전 생신을 맞으셨던 사장님 댁에 한 번 가보자는 장인어른의 말에 딸을 데리고 사장님 댁으로 갔다.


  이면 도로 약간 비탈진 언덕길 양쪽으로 들어선 단독 주택단지 내 한 주택에서 부부가 살고 계셨다. 2, 30평 정도로 보이는 마당에는 잔디가 잘 가꾸어져 있었다.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사모님과 마침 집에 와있던 막내딸과 인사를 나눈 뒤 잔디 마당의 야외용 테이블에 앉았다. 잔디 마당의 푹신한 촉감이 좋아서인지 딸은 5월의 다소 따가운 햇살임에도 불구하고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마침 마당 한쪽에 있는 배구공을 발견하고 발로 툭툭 건드리며 놀았다. 


  외향적이고 활달한 성격이라 집에서 놀기보다 밖에서 친구들과 어울려 뛰노는 것을 좋아하는 딸이었다. 아파트 같은 층 또래들과도 누가 더 높은 계단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지 겨루는 놀이를 하는 모습에 깜짝 놀라 제지하기도 했었다. 딸이 공을 갖고 노는 모습을 본 두 분이 공을 한번 차 보라고 하셨다. 두 할아버지의 부추김에 망설이지도 않고 뒤로 한두 걸음 물러선 뒤 공을 찼다. 공이 이웃집과 경계선인 담벼락까지 날아갔다. 그런 딸의 모습에 '저놈 봐라' 하며 웃으며 한 번 더 해 보라는 말에 딸은 몇 차례 더 공을 찼다.


  안으로 들어와 차와 과일을 드시라는 사모님의 말에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거실 탁자에는 찻주전자, 찻잔과 가져간 생일 케이크와 일인용 접시 그리고 과일 접시가 놓여 있었다. 차를 마신 후 케이크에 생일 양초를 꽂은 다음 불을 붙였다. 양초를 꽂을 때부터 딸의 시선은 온통 양초에 가 있었다. 생일 축하 노래가 끝난 후 초를 입으로 불어 끄는 일은 대부분 아이들이 하고 싶어 하는 일이다. 남은 양초를 손에 쥔 딸도 하고 싶은 듯한 눈치가 보였다. 그런 딸의 마음을 알아차린 사장님이 '그래, 노래하고 나서 할아버지 하고 같이 불어 끄도록 하자' 하셨다. '자, 이제 할아버지 생신 축하 노래해야지' 하는 주문에 따라 밝아진 표정의 딸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사랑하는….' 이 부분에서 딸이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노래를 이어갔다. '사랑하는 남의 할아버지 생일 축하합니다.' 모여있던 모두가 동시에 박장대소하였다.

'야, 저놈 봐라. 뭐, 사랑하는 남의 할아버지라고 ‘ 하며 한참을 웃었다. 생각지 못한 딸의 재치에 모두가 한 마디씩 했다. ‘어쩜 어린애 머리가 그렇게 돌아갈까. 그 순간에 남의 할아버지라는 말을 어찌 생각해 내었을까?’ ‘그래, 맞다. 친할아버지는 한 사람 밖에 없으니 남의 할아버지가 맞다 맞아.’ ‘그놈 참, 영리하기도 하다. 머리가 저리 잘 돌아가니 학교 가면 공부도 잘하겠다.' 등 딸의 순간적인 기지 덕분에 케이크를 먹는 내내 '남의 할아버지' 얘기로 웃음꽃을 피웠다.


  추석이라 시댁에서 하룻밤을 보낸 딸이 내일 점심때 집에 온다는 연락이 왔다. 내일 엄마랑 함께 오는 손녀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줘야겠다. 재치나 순발력은 딸 못지않은 손녀의 반응이 어떠할지 못내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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