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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기타 Oct 12. 2023

흑백 사진과 성적표

 대학 2학년 어느 봄날의 주말이었다. 어머니가 차려주신 늦은 점심을 먹고 난 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중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너희 4남매는 아버지를 닮아 주머니에 돈이 있으면 남에게 쓰려고 하지, 아끼고 모을 줄 모르니 부자로 살 것 같지 않다.”라며 걱정과 아쉬움의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 끝에 “너희 아버지가 가진 재주 중에서 다른 건 몰라도 글재주 하나는 너희 중 누가 물려받길 바랐으나 누구도 그런 재주가 있어 보이지 않는구나.”라며 아쉬워하시던 기억도 또렷하다.

 그 말씀 때문에 아버님이 글을 잘 쓰셨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아버님을 닮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며칠 후 아버님의 글이라며 한 시(漢詩) 한 편을 장롱에서 꺼내 보여주셨다. 지금의 A4 크기보다 조금 작고 두세 번 접은 자국이 있는 색바랜 한지에 글씨가 적혀 있었다. 가는 붓으로 쓰신 한시 아래에 그 뜻을 풀어놓으셨다. 깨달음을 위해 수행 중인 구도자의 심경을 학문에 비유한 글이었다. 두보나 이백의 문장인지 아버님의 창작인지 언제 한번 여쭤봐야지 하고 책갈피 사이에 끼어 두고 몇 차례 꺼내 보았으나 수십 년 세월이 흐른 지금 어디 두었는지 찾지 못하고 있으니 이런 불효도 없다. 아스라하고 토막 난 기억을 되살려 본 아버님이 써놓으신 글이다.     

가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 서산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노라. / 배움의 길 떠난 이가 열이면 / 그중의 셋은 돌아오지 않네. / 구도와 학문의 길은 끝이 없도다 / 멀고도 아득한 배움의 길이여.      

 아버님은 결혼 전 일본으로 유학을 다녀오셨다. 일제 치하의 암울했던 그 시절, 조부님의 결정인지 한학을 하시고 서당 훈장을 하셨다는 백부님의 권유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본 열도 아래쪽 후쿠오카 복강(福岡) 농업전문학교에서 2년간 유학하셨다. 그 한시는 부모님을 비롯한 온 가족의 기대 속에 홀로 떠나온 유학 생활에서 겪고 느낀 여러 감정을 표현한 것으로 이해되었다. 시집와서 남의 땅 밟지 않고 살았다는 어머님의 말씀으로 짐작건대 ‘토지의 평사리 최참판댁’만큼은 아닐지라도 집안 소유 농토가 꽤 많았던 모양이었다. 그 땅의 일부가 아버님 유학과 뒷바라지를 위해 처분되었을 것이다. 

 현해탄을 가르는 관부연락선 갑판 위에서 점점 멀어지는 고국산천과 다가오는 일본 땅을 바라보는 한 조선 청년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을까? 온 집안의 기대를 걸머지고 공부하러 간 곳은 망국의 아픔을 안겨준 적국 일본이었다. 반드시 부모·형제의 기대에 부응하는 학문적 성과를 이루고 말겠다는 각오만큼이나 부담감도 컸으리라. 나름 혼신의 노력으로 학업에 정진했을 당시의 심경을 표현했거나 비유했을 것으로 짐작될 뿐 이미 고인이 되셨으니 직접 확인해 볼 기회를 영영 놓쳐 버렸다.     

 아버님의 유학 시절에 대해 알고 있는 오래된 기억 중 하나다. 결혼 후 어느 주말 부모님을 뵈러 갔다가 아버님 유학 시절의 흑백 사진 몇 장과 성적표를 볼 기회가 있었다. 사진은 단체 사진과 아버님의 독사진 외 조선인 학우들과 찍은 몇 장의 사진이 아버님의 앨범 속에 있었다. 단체 사진 맨 앞줄에는 기모노를 차려입은 교장을 중심으로 일본인 선생들과 군도(軍刀)를 찬 군인들이 있어 당시 일본이 전쟁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두 번째 줄 서 있는 학생들과 그 뒤로 걸상과 책상 위에 올라선 듯한 학생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익숙한 짧은 머리, 검정 상·하의 교복이었다. 

 성적표에 기록된 아버님의 학급 석차는 전 학기 2등이었다. 대부분 10점 만점이었으나 유독 체육은 8점이었다. 보통의 체격이신지라 큰 체격의 일본 학생과 차이가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일본인 선생에겐 식민지 반도인(半島人)이 본토인(本土人)보다 앞서지 못 하게 하는 좋은 구실이었고, 1등을 차지했을 경우 어쩌면 겪었을지 모를 동급생의 질시와 국수주의(國粹主義)적 사고를 가진 일본인 교사에게 받았을 유무형의 핍박을 피할 수 있었으니 한편으로 다행이었다고 생각되었다.

 다른 기억 하나는 딸이 서너 살 무렵이었다. 아버님 방에 들어가니 편지 한 통을 보여주셨다. 유학 시절 학우들의 안부가 궁금하여 얼마 전 학교에 보낸 편지에 답장이 온 것이라 하셨다. 

 ‘아니, 그때가 언제인데, 편지가 어떻게 전달되고 당시 학생들의 근황을 어찌 파악할 수 있었을까?’ 하는 호기심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지금의 엑셀 프로그램과 유사한 형식의 자료 아래쪽으로 당시 학생들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었고 오른쪽으로 주소가 적혀 있었다. 고인이 되신 분은 이름 앞에 굵은 까만 점으로 표시해 놓았다. 아버님 외에도 조선인 유학생이 몇 분 더 계셨는지 '가타카나'나 '히라가나'가 아닌 한문으로 표기된 누가 봐도 분명한 조선인의 이름이 몇 분 더 있었다. 오십여 년 전의 졸업생 근황을 어찌 이토록 세세히 파악할 수 있었을까? 아버님도 이런 답장을 받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다행히 학교가 존립하고 있어 편지가 전달될 수 있었고 기록을 중시하는 그들의 습성이 이런 답장을 가능하게 했으리라 짐작했을 뿐이었다. 당시 칠순을 넘기신 아버님이셨으나 어찌 젊었던 학창 시절의 향수(鄕愁)마저 없었을까? 비록 육신은 노쇠하였으나 그 시절 추억마저 쇠락하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 마음에서 동문수학한 옛 학우들의 얼굴과 추억이 생각나 편지를 보내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지금도 못내 아쉬운 것은 그때 아버님의 심중을 헤아려 짧은 일정이나마 아버님 모시고 한 번 다녀왔어야 했음에 그러지 못한 점이다. 떠나가신 후 아버님 기일 때면 형님, 누님과 함께 왜 그때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하며 흑백 사진 속의 아버님을 보며 자책하곤 한다.     

 떠나가신 지 십수 년, 추석 명절이 얼마 남지 않았다. 이번 추석 차례상에는 그 시절 아버님의 사진을 올려놓고 술 한 잔 올린 후 절하며 간절히 빌어보리라. ‘그때 사진과 성적표를 보여주신 아버님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던 철부지 자식들을 용서하시고 이제라도 한번 모셔가고 싶으니 우리 사남매 누구의 꿈에라도 꼭 한번 다녀가 주십사’라고… (2022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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