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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창복 Sep 09. 2024

비 밀

단편 소설 4



길었던 중학교 1학년이 지나고 겨울 방학이 왔다.

매일 아침 미어터지는 버스를 타고 1시간 넘게 걸려 등교를 했다.

왜소한 체격으로 사람들 틈에 낀 가방을 끄집어내는 일이나

내릴 문 앞에 밀집해 있는 사람들 때문에 정거장에 내리지 못하고 지나친 일이나

내릴 정거장을 지나칠까 봐 급하게 사람들을 비집고 내리고 보니 모자가 없어진 일이나

나에게는 너무나 버거웠던 일들이었다.

이제는 해방이다.


범석이를 만나려고 집에 갔다.

범석이를 만나 수다를 떤다.


“이번에도 성탄 카드 보낼 거야?”

“응, 그러려고 생각 중이야”

“이번엔 무슨 그림으로 할 건데”

“아직,,, 어, 학을 그려 보려고. 성탄절뿐만 아니라 새해카드 겸”


범석이는 내가 그린 그림을 마음에 들어 한다.

나의 유일한 친구가 내가 그린 그림을 좋아한다니 기분이 좋다.


“근데, 우리 비밀 암호를 만들어 볼래?”

“그게 뭔데?

“성탄 하면 시옷이 있고 어가 붙잖아. 그럼 영어 알파벳처럼 나열식으로 바꾸고 바꾼 시옷이나 이응 같은 것들을 우리가 다른 걸로 만드는 거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와, 재밌겠다. 지금부터 만들어 보자”

“하나씩 만들고 너랑 나랑 비밀 암호 해독용으로 하나씩 가지면 되겠지?”

“이번 카드부터 비밀 암호 문자로 써서 보내기다”

“그래”


범석이와 둘이서 이틀에 걸쳐 암호 해독용 테이블을 두 개 만들어 각자 하나씩 가졌다.

아무에게도 들키지 말고 다른 친구들에게도 비밀로 하자고 굳게 약속을 했다.

중학교 1년 동안 잃어버렸던 유일한 친구를 다시 되찾은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둘만이 유일한 동맹을 맺고 동지가 된 것 같아 그동안 쌓였던 어둠이 환하게 걷히는 기분이었다.

이후로도 우린 버스를 타고 서울 시내를 돌아보는 여행도 해보았다.

시내버스는 시내를 순환하는 거라 차비 한 번만으로 거의 네 시간 정도를 함께 놀 수 있었다.

눈이 내리고 혼잡한 미도파백화점이나 남대문 거리는 어린 친구들에겐 좋은 구경거리였다.




“야, 누구야!”


중 2가 시작되었다.

첫 교시가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되자 여기저기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린다.

덕구가 승원이 의자를 뒤로 빼서 막 앉으려던 승원이가 뒤로 나자빠졌다.

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두 녀석이 으르렁 거린다.

어떤 놈은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어떤 놈들은 술래잡기라도 하려는 듯 책상사이로 도망치고 잡으러 다닌다.

칠판을 지우는 놈, 책을 보는 놈, 먼산을 보는 놈, 심지어 도시락을 먹는 놈까지 가지각색으로 번잡스럽다.

교실은 난장이 열리는 시골 장터 같다.

비로소 다음 수업종이 울리자 제자리로 돌아가 조용해진다.


“이번주는 왼쪽분단부터 청소니까 깨끗하게 하도록, 이상”

“차렷, 경례”

“감사합니다!”


우렁차게 인사를 하고 모두들 가방을 챙겨 교실을 빠져나간다.

근데 난 오늘부터 청소가 걸렸다. 재수가 오지게 없다.

책상과 걸상을 뒤로 모두 밀고 빗자루로 빗질을 한다.

덕구의 빗질로 교실은 뿌연 먼지가 가득하다.

창문을 모두 열고 각자 일을 나눠서 하기로 한다.

난 물청소를 하려고 마대자루를 들고 화장실로 향한다.

아직까지 친하게 지낼 친구를 찾지 못했다.

덕구는 1학년때 같은 반이라 아는 편이지만 친하지 않다.

물이 줄줄 흐르는 마대자루를 들고 교실로 향한다.

여전히 먼지로 자욱한데 물청소를 하자 먼지가 덜 나른다.

워낙 먼지와 흙이 많아 다시 마대자루를 빨려고 화장실로 간다.

또 청소하는 사이에 몇 녀석은 키득거리고 얘기하며 놀고 있다.


“아휴, 저 뺀질이들”

“야, 빨리 청소하고 가야지”

“알았다구, 너나 잘하세요”

“야 새꺄, 선생님 올라오신다고. 너 혼날래?”


티격태격하면서도 놈들은 하는 척을 한다.


“바닥 청소 다 했으니까, 책상을 다시 밀자”


책상을 하나씩 밀고 있는데 이번엔 덕구가 밀어 놓은 책상더미에서 애들하고 키득거리고 있다.

덕구는 미술 스케치북을 들고 애들에게 그림이라도 구경시켜 주는 것 같다.


“야, 덕구야. 너도 노냐?”


한참을 책상을 밀고 있는데 덕구와 그 패거리들은 아직도 놀고 있다.

난 그 옆으로 가며 한소리 한다.


“야, 빨리 하자니까! ,,,,,,,,,,,뭐야?,,,,,,,,,”


눈이 휘둥그레졌다.

덕구 녀석이 스케치 북에 포르노 그리피 사진을 오려서 붙여온 것이다.

난 순간 멈칫했지만 어느새 덕구의 무리들 속에 한 무리가 되어 있었다.

가슴이 콩당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리고 다리가 떨린다.


“야,, 이거 어디서 난 거야?”


한 장 한 장을 넘길 때마다 새로운 기대와 떨림이 마구 밀려왔다.

덕구와 패거리들은 청소를 마무리할 생각을 접었다.

스케치북 전 페이지를 다 보고도 다른 녀석의 요청으로 다시 첫 번째 페이지부터 돌려 본다.


“동작 그만!”


와 씨, 어느새 담임 선생님이 와 계신다.

청소는 끝나지도 않았는데 스케치북도 들키고 우린 얼음이 되었다.


“이놈들 봐라? 이거 누구 거야? 니들 이리로 나와”


“여기 복도 끝에서 저기 복도 끝까지 오리걸음으로 갔다 온다. 알았어?”


우린 모두 오리걸음을 했다.

넘어지고 다리가 아파 끙끙거리며 긴 복도를 오리걸음으로 왕복을 했다.

그러면서도 키득거리며 웃고 서로 청소를 빨리 했어야 한다며 서로 탓을 한다.

중간에 지나가던 친구들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다.

중학교 들어와서 처음으로 혼이 났다.




‘라디오 만들기’가 숙제로 잡혔다.

라디오를 만든다기보다 거의 완성된 제품을 조립하는 숙제이다.

만들었던 애들 얘기를 들어보니 ‘ㅅ’ 상가에 가면 싸게 살 수 있다고 한다.

수업이 끝나고 덕구와 승원이와 세 명이서 ‘ㅅ’ 상가로 가기 위해 버스에 올랐다.


“나만 믿어, 난 거기 가 본 적 있거든”


덕구가 대단한 자랑거리인양 으쓱대며 말을 잇는다.


“니들 내 뒤만 따라다녀, 알았지?”


영문도 모른 채 덕구와 함께 ‘ㅅ’ 상가 앞에 내렸다.

라디오 조립품을 파는 곳이 2층이라며 진짜 잘 안다는 듯 앞장을 선다.

2층으로 들어가니 상점들이 오밀조밀 모여 있고 물건들도 키 높이 위까지 한가득이다.

덕구는 요리조리 좁은 길을 헤집고 다니다가 한 상점을 찾아낸다.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싸게 구입을 해서 약간의 용돈이 생겼다.

용돈이 생겨 기분이 좋아진 우리는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간다.

키득거리고 수다를 떨며 상가 밖으로 나와 막 계단으로 내려가려는데 2층 구석진 코너에서 누가 우릴 부른다.


“야, 니들 여기 왜 왔니?”


우리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사내는 얼굴이 검고 인상이 더러웠다.


“라디오 사러요”

“내가 좋은 거 구경시켜 줄게, 이리 와봐”


우린 무서워서 뒷걸음질도 못했다.


“뭔데요?”

“자식들이, 오라면 올 것이지, 빨리 안 와?”


우리 3명은 그 인상 더러운 사내가 부르는 대로 갔다.

사내는 뒷주머니에서 외국 잡지를 꺼내 보이며 이런 거 본 적이 있냐고 한다.

당연히 모른다고 했는데, 알고 보니 포르노 잡지였다.


“돈 있어? 돈 있으면 이거 사라. 2천 원에 줄게”

“그런 돈 없어요”

“이 새끼들, 구라를 떨어? 뒤져서 나오면 죽는다”


인상 더럽고 무서운 사내가 잡지를 강매하려고 하는 건지 돈이 필요한 건지 우린 알지 못했다.

그놈은 우리의 버스비와 용돈을 갈취했다. 그리고 잡지도 주지 않았다.

빼앗긴 돈정도라면 적어도 다섯 페이지 정도는 우리 것이었다.


“이 새끼들, 버스비는 있어? 여기 하나씩 준다. 인심 썼다”


겨우 버스비 한 장과 책가방 그리고 라디오 조립품을 들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덕구는 잔뜩 풀이 죽었고 난 두려워서 말 한마디 없이 헤어졌다.


‘ㅅ’ 상가는 무서운 놈이 버티고 있는 곳이지만 그놈이 들고 있던 그 잡지도 궁금한 곳이다.



5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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