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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ul 06. 2023

완전함의 한국, 온전함의 캐나다

불완전함의 저주와 축복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던 시절, 파트타임으로 공부한 끝에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여기저기 포닥 (박사후 연구과정)을 알아보다가 캐나다 알버타 주로 가기로 한 동료가 있었다. 회사에 휴직서를 내고 원하는 교수님의 연구실에 가서 포닥을 잘 마치고 논문도 만족스럽게 발표하고 왔다. 당연히 좋은 기회를 준 캐나다에 대한 평가도 좋을 줄 알았는데, 어쩐 일인지 그렇게 않았다. 이유를 들어보니 이랬다. 


캐나다에서 연구실 동료들과 종종 축구를 했더란다. 캐나다를 잘 모르던 나는 알버타 주는 일년 내내 겨울인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니란다. 그저 일년의 반이 겨울일 뿐이라고 - 그래서 놀 수 있는 나머지 6개월동안 다들 열심히 야외에 나가 논다고 했다. 


그런데, 너무 격렬하게 축구를 했는지, 그만 어깨뼈가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거다. 동료들 차를 타고 서둘러 병원 응급실로 갔는데, 마침 퇴근하던 응급실 의사와 마주쳤다. 어휴 조금만 늦었어도 큰일날 뻔 했다, 하고안도의 숨을 쉬었는데, 의사가 슬쩍 살펴보더니, 생명에는 지장이 없고 자신은 지금 퇴근하는 길이니 내일 아침에 보자고 했다는 거다. 그래서 하룻밤을 꼬박 응급실에서 보내면서 너무 기가 막혔단다. 한국에서라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라며,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면서 거품을 물었다. 그래도 잘 치료가 되었으니 결과적으로는 다 잘 된 것 아니냐고 했더니, 아니라고, 그 뒤가 더 화가 난다고 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하루 밤을 진통제 맞아가며 버티고 겨우 수술을 받았는데, 치료가 끝난 후에도 느낌상 완전히 다 나은 것 같지는 않더란다. 점차 나아지겠지, 생각하고 정기 진료를 갔는데, 의사와 같이 x-ray 사진을 보게 되었다고. 그런데 의사가 아닌 자기가 봐도 뭔가 뼈 모양이 부자연스러웠다고 했다. 그래서 의사에게 '어깨뼈 이 부분이 원래 이렇게 생겼냐'고 물었더니, 그렇지 않다고 하더란다. 깜짝 놀라서 그럼, 수술을 다시 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의사가 몇 가지를 시키더란다 - 팔을 들어 보세요, 팔을 돌려 보세요, 팔을 깍지 껴 보세요... 시키는 대로 다 하고 났더니, 의사가 이렇게 말했다고 했다. 


다 잘 되네요. 아무 문제 없네요.


내 동료는 그 생각만 하면 너무 화가 난다면 이렇게 말했다. 


사람을 팔병신을 만들어 놓고 그게 할 말이야?


캐나다 의사는 팔이 제 기능을 다하면 문제가 없다고 본 것이지만, 내 동료 입장에서는 팔이 원래 상태 그대로 원상복구가 되었는지가 판단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한 쪽에서 보면 완치가 된 것이지만, 다른 쪽에서 보면 팔병신이 된 것이었다. 


캐나다에서 살아가려면 한국에서보다 눈 높이를 낮추어야 한다는 것에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한다. 한 여름에 냉장고가 고장나도 1주일은 걸려야 AS 기사가 오고, 은행에서 업무를 처리하려면 하세월이다. (그런데 2022년 한국에 갔을 때에는 한국 은행 창구에서도 업무 처리 속도가 너무 느려져서 놀라긴 했었다). 그래서 다른 나라를 살아보지 못한 캐나다인들은 서비스에 대한 기준과 기대치가 한국 사람들에 비해 낮다. 


항상 낮은 기준 속에서 살다보면 당연히 평가의 기준이 낮아진다. 기준을 낮추면 쉽게 만족한다. 마치 한국보다 개인당 소득이 훨씬 적은 부탄이, 행복지수는 한국보다 훨씬 높다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다른 의견도 있다. 캐나다의 기준이 낮은 것이 아니라 삶의 기준이 다른 것 뿐이라는. 만일 그 관점이 맞다면 이렇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한국은 완전함을 추구하면서 불평하지만, 캐나다는 온전함으로 만족한다. 


다른 글에서도 언급했지만, 이런 철학이 아이들 교육과 연관이 되면 속이 터지는 경우가 많다. 한 발 더 나갈 수 있는데 왜 멈춰서는지 답답하다. 아빠가 보기에는 한 발짝, 두 발짝만 더 걸으면 완전해지는데, 왜 온전함에서 멈추는지 모르겠다고 아이들에게 말해야 할 때면 캐나다의 온전함이 불완전함에 다름 아닌 것 같다. 


하지만, 여기에 맞춰 살다보면, 거꾸로 왜 한국에서는 만족하고 살지 못했을까 의아하기도 하다. 한국에서는 화를 내던 일도 캐나다에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다 보면, 불평이 줄고 만족이 늘어나고, 만족이 늘면 조금 더 여유가 생기도 조금 더 감사가 늘어난다. 내 팔이 원상복구 되지 않았다는 불만보다, 아무런 이상없이 움직인다는 감사가 먼저 온다.


그래서, 어쩌면 불완전함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은 일면 저주라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축복인지도 모르겠다. 완전하지 않아도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아무 불편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해 주는 것이 바로 그 불완전함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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