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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Oct 06. 2023

억울함이 때로는 필요하다

성취한 자리를 털고 일어나기는 어려우니

캐나다 법조계에는 보통 4가지 직군이 있다. 변호사 (판사, 검사 포함), 법무사 (paralegal), law clerk, 그리고 legal assistant. 


캐나다 법무사의 역할은 한국과는 조금 달라서, 업무 범위가 좁은 변호사와 유사한 역할을 하며. 소액 재판이나, 가정법, 이민법, 형법 등을 다룰 수 있다. law clerk은 변호사 업무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면서 변호사 업무 중에서 반복성이 있는 일을 처리하며, legal assistant는 로펌의 운영 (administration)을 주로 다룬다. 


나는 legal assistant나 law clerk 으로 시작한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고 학교를 다시 다녀서 법무사나 변호사가 된 경우를 직접 보기도 했고, 많이 듣기도 했다. 


함께 일하던 law clerk이나 legal assistant가 어떤 이유로든 그만두면 회사에는 일단 불편함이 있을 수 밖에는 없지만, 개인의 발전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바람직한 일이고 장려할 일이다. 어쨌든 law clerk이나 legal assistant 보다는 법무사나 변호사의 업무 법위가 더 넓고, 더 드물고, 일반적으로 수입도 더 높고, 주위 사람들의 인식도 좋으니 말이다. 


어찌보면 그런 욕구가 드는 건 당연할 지도 모른다. 똑같이 월급쟁이로 같은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면 변호사나, law clerk이나 legal assistant나 일하는 시간도 비슷하고, 업무에서 받는 스트레스도 비슷하다. 받는 월급만 다르다. 변호사 월급이 월등히 높다. 그러니, 억울할 수도 있다. 저 변호사 일은 내가 다 해 주는데, 그저 로스쿨 3년 다녔다고 그렇게 큰 월급 차이가 나는 건 억울하다... 는 생각이 드는 것이 자연스러울 수 있다. 그러니, 지금 받는 대우가 부당하고 억울하고 생각해서 로스쿨에 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법무사로 시작하신 분들 중에서는 변호사를 하겠다는 분을 찾기 어려웠다. 어쨌든 겉으로만 보아서는 법무사보다 변호사의 업무 범위가 더 넓고, 권한도 더 많고, 늘 그렇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수입도 더 좋으니, 기왕 법조계에 들어온 거, 나도 로스쿨 가서 변호사나 해야겠다... 알고보니 법무사 공부나 변호사 공부나 별 차이도 없었는데... 한 번 해 본거 두 번은 못하랴... 라는 생각을 하는 법무사 분들이 있을 듯 싶다. 그런데, 찾아보기 어려웠다.  


왜 그럴까? 어쩌면 그건 억울함이 적어서일지도 모르겠다.  


법무사 공부한 것만큼은 대우받고, 법무사 공부한 것만큼은 수입도 만들어지고 있으니, 부당한 대우라고 생각되지도 않고 별로 억울할 것도 없다. 변호사가 되면 뭐 좀 더 나은 대우를 받을지는 몰라도 그것 때문에 굳이 로스쿨 입학시험을 준비해서 3년을 비싼 학비 내 가면서 공부하고, 1년 연수 생활을 할 만큼 큰 유혹은 아니다. 그렇게까지 억울하지도 않고, 그러니 이미 이룬 것을 포기할 만큼 간절하지도 않다 - 이런 것일지도 모르겠다.  


지금 산 아래에서 등반을 시작해야 한다면 백두산에 오르겠노라 할 지 모르지만, 이미 힘들게 한라산을 올라왔는데 굳이 다시 하산해서 백두산을 오르고 싶지는 않다. 한라산도 충분히 높고, 충분히 아름다우니까.


캐나다처럼 직업을 따지지 않는 곳에서는 더욱 그럴 것 같다. 하지만, 만일 그 분들이 법무사를 준비하던 시절로 회귀해서 변호사, 법무사, law clerk, paralegal 중에서 다시 시작할 기회를 받는다면, 나는 그 분들 중에 이번에는 로스쿨을 선택할 분이 적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어차피 해야 한다면 법무사 과정이나 변호사 과정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알았으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나도 회사에서 억울한 일이 없었으면 새로운 시도는 하지 않았을 것이었다. 회사에서 대우가 충분히 좋았을 때, 나는 새로운 시도는 꿈도 꾸지 않았었다. 그 길이 막다른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었다. 


가끔 성취가 나를 오히려 나아가지 못하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적이 있었다. 고객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많은 분들이 비슷한 경험을 하셨다. 작은 것이라도 한 번 성취를 하면 아무래도 그 자리에 오래 머무르게 된다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어렵게 성취한 것을 훌훌 털고 일어나는 건 정말 어렵다고 하셨다. 


투자에 비해 충분한 성취라는 생각이 들면 더더욱 내가 이룬 것을 내려놓기 어렵다. 


그래서, 부당하고 억울한 대우는 받는 때가 있다는 건, 한편 기회다. 그런 마음이 없으면 나를 앞으로 밀어줄 힘이 없다. 지금 새겨진 억울함만큼 마음은 단단해지고, 그 마음이 있어야 새로 시작한 자리에서 겪을 어려움을 헤쳐갈 수 있다


그래서, 부당하고 억울한 대우도 반갑게 맞아주면 내겐 자산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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