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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광훈 Jan 23. 2023

바나나와 프린터

폐기되기 전에 숙성되어야 

(이 글에서는 '직-장인'과 '직장-인' 두 단어를 구별하여 사용합니다. 이에 대한 짧은 글 (https://brunch.co.kr/@e5c821d0bd7b442/9)을 먼저 읽으시면 이 글을 더 잘 이해하실 수 있습니다)


한국에서 식물병리를 공부하고 관련 업무를 하던 시절, 검역소에 일하는 후배와 함께 수입된 바나나 보관소를 멀찍이서 잠깐 본 적이 있었다. 깜짝 놀랐다. 모든 바나나가 초록색이었다. 덜 익은 바나나를 따서 숙성을 시켜 판매한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나 시퍼런 바나나를 수입하는 줄은 몰랐다. 


사람에 따라 바나나를 좋아하는 최적의 시기는 다르다. 나는 적당히 익은, 떫지는 않지만, 그래도 단단함이 남아 있는 상태를 좋아하지만, 아버지께서는 과숙되어 겉이 까맣게 되어 가는 바나나를 좋아하셨다. 그런데 바나나는 덜 익은 상태에서부터 완숙의 상태에 이르기까지 숙성도에 따라 양분의 구성이 달라진다. 


바나나가 더 숙성될수록 더 달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다. 굳이 과정을 들먹인다면 숙성될수록 바나나에 함유된 효소가 녹말로 더 많이 바뀌고, 다시 이 녹말이 당분으로 바뀌는데, 이렇게 숙성이 진행될수록 바나나를 소화하기도 더 쉽다고 한다. 그리고, 잘 익은 바나나는 면역력 강화 효과가 높으며 암과 싸우는 성분이 더 많아진다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고 꼭 샛노랗거나 까만 바나나만 좋은 것은 아니다. 여러 연구에 따르면 바나나가 익어 갈수록 비타민과 무기질은 없어진다고 하니, 푸른 바나나가 어르신들께는 더 좋은 점이 있다.


그러니까, 바나나는 나이가 들어가면서 그 용도가 달라진다. 


하지만, 프린터는 어떤가? 프린터는 처음부터 종이에 출력을 하기 위해 만들어졌고, 사용할수록 그 성능이 떨어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종이에 출력하는 성능의 가치가 없어질 뿐, 새로운 용도가 생기지는 않는다.   


직장-인으로 산다는 것은, 프린터 같은 삶을 산다는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 몸 값에 비해 내 효용은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럼 회사의 눈치를 보아야 한다. 


하지만, 직-장인이 되기로 한다면 프린터가 아니라 바나나로 살기로 한 것이다. 직-장인은 30대가 되었다고 해서, 40대가 되었다고 해서 효용이 떨어지지 않는다. 다른 용도가 생기기 때문이다. 회사가 내 눈치를 보는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내가 회사의 눈치를 볼 일은 없다. 


종종 우리는 더 좋은 프린터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경쟁한다. 프린팅 뿐만 아니라 스캔도 할 줄 아는 기계, 한 번에 수 백장의 팩스를 보낼 수 있는 기계, 종이를 몇 백장씩 보관할 수 있는 기계. 물론 좋은 시도다. 하지만, 그 기본 기능, 출력이라는 기능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때는 오게 마련이고, 프린터 드럼을 바꾸듯 그렇게 쉽게 지나간 세월을 되돌릴 수는 없다. 


어떤 숙성 과정을 택할지에 대한 정답은 없겠지만, '노후된 기계' 소리를 듣지 않고 '숙성된 과일'이라는 말을 들으려면 아직 푸릇푸릇한 바나나일 때 부터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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