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여행기 2
호기심 가득한 아이를 데리고 미국에서 캐나다로 이동 중이었다. 가는 도중 한 숙소였던 호텔에서의 사건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루 일정을 마치고 그 날도 지쳤지만 새로운 세상을 구경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들떠서 씻고 바로 곤히 곯아떨어진 날이었다. 저녁에는 숙소에서 사진 정리하고 기념품 산 것 구경하다 보면 사실 말똥말똥거리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 그냥 푹 잠들기 일쑤였다.
새벽 한 3시쯤 되었을까.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호텔 숙소에서 안내 방송이 나왔다.
"Fire, Fire, Fire!.."
처음 잠결에 들었을 때는 잘못된 기계음의 방송인가 싶었는데, 옆 호실에서 문을 달그락 쿵쿵거리며 뛰쳐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밖에서 웅성웅성 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서, 곧바로 일어났다.
"Fire, Fire, Fire, Attention, Attention, Fire, Fire!"
'아차!' 싶었다. 정말 불이 났구나. '이 호텔 어디선가 불이 났나 봐..' 정신없이 아이를 깨웠다. 내가 바빠지기 시작했다. 여행 다닐 때 보통 캐리어를 숙소에 활짝 펼쳐놓는 편이고 짐들도 내 집인 양 물건들을 이곳저곳 자리 잡아 두는데... 아이를 먼저 깨우고 상황을 알리고서 나는 욕실 서재 등등 막 휘져어 다니면서 뿔뿔이 흩어진 짐들을 다시 가져다 캐리어에 정신없이 넣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아이가 내 정신을 바짝 차리게 말 한마디 했다. "엄마! 이 짐을 다 들고 내려갈 수 없어!" 그냥 얼른 나가자~! 지금 바로 나가야 해! 얼른! 얼른 나가자!! 빨리 나가야 해!" 난 머리 뒤통수를 망치로 맞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 너 말이 맞다!", "그냥, 가자!!", 난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만 얼른 메고 그 높았던 호텔 중 다행히 6층이었던 숙소 방에서 탈출을 시작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이 전망 좋은 호텔에서 6층에 방 배정받고 조금은 아쉬웠는데 방문을 나와 비상 출구를 더듬더듬 찾기 시작 그리고 겨우 빠져나왔을 때는 6층이어서 그래도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계단을 내려오는데 어디선가 타는 냄새 그리고 앞이 잘 보이지 않게 연기가 스며들 듯 올라오는 것 같고... 어떤 생각할 틈 없이 순간순간이 아찔했다. 내려갔는데 문이 닫혀 있음 어쩌나 하는 생각도 들었었다. 거미줄처럼 복잡하고 워낙 큰 호텔이었어서 아이를 데리고 비상구도 겨우 찾았는데 사실 우리가 찾았다기 보다는 다른 유럽 여행객들 따라 더듬더듬 나오다 보니 다행히 비상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6층에서 1층 그 순간은 너무 멀게 느껴졌다. 바로 사이렌이 울리면서 소방차들이 계속 들어오고 있었고 소방관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린 다행히 먼저 탈출 성공!
유럽인들인지 미국인들인지 그들은 신발도 안 신고 그냥 뛰쳐 나왔다. 옷도 엉성하게 잠옷바람에 슬리퍼를 신고 그냥 나온 사람들이 많았다. 어디선가 한국 여행객 몇 분이 낑낑거리며 캐리어를 들고 우리 근처로 오셨다. 캐리어를 챙기고 계단으로 내려오는데 짐은 무겁고 이를 어쩌나 하면서 내려오는데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면서 지금까지도 다리가 후들거리고 근육들이 놀라 온몸이 다 아프다고 했다. 다음날도 호텔 식당에서 마주쳤는데 놀란 마음을 추스르면서 온몸의 근육통을 계속 호소하셨다.
나도 똑같이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내려올 뻔했다. 똘똘한 아이의 빠른 판단이 아니었으면 그 불이 커져서 잠깐 몇 분 지체할 동안 우리가 내려오지 못했다면 지금 이 자리에 우린 없었을 수도 있다. 소방차 몇 대가 오고 밖에서 좀 기다리고 있으니까 한 두 시간 남짓, 소방관들이 건물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안 되는 영어로 무슨 일인지 이제 괜찮냐고 물어보니까, 엘리베이터 쪽에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했다. 그 부분만 알아들었다. 생각해보니까 엘리베이터 한 쪽이 오랜 역사를 간직한 것처럼 나무로 되어 있어 보였고 오래된 편이었다. 그 날, 도끼를 들고 나오는 소방관들(영화에서나 볼법한 장면)을 실제 우리는 멍하니 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끝이 나서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가슴을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소방관은 거인처럼 커보였고 손에 든 도끼도 엄청 컸다. 다시 숙소로 올라왔다. 너무 놀랐고 한국에 있는 식구들에게 소식으로 사진을 보내면서 상황을 알려드렸다. 새벽 5시가 넘어 방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아이도 놀라 잠이 안 온다고 했다. 다음날 일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가 피곤할까봐 걱정이 되어 한국에서 챙겨 온 라벤더 오일 향을 아이 베개에다 좀 뿌려주었다. 심리적 안정 효과랑 숙면을 유도하려 했던 것인데, 몇 분이 채 안 되어 아이는 눈이 따갑고 아프다고 난리가 났다. 눈을 씻으러 갔다. 내가 너무 많이 뿌렸는지 그 성분이 아이 눈에 들어갔는지 심했으면 눈이 심하게 충혈될 뻔했다. 다행히 눈을 씻고 베개를 바꿔주고 나서야 몇 마디 나누다가 깊은 잠에 들었다. 새벽 일정이 온통 뒤죽박죽 난리 났던 하루였다.
“엄마, 다음번에 이런 상황이 생기면 제발 짐은 챙기지 말고 그냥 나가야 하는 거야!” 아이가 도리어 나를 가르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 다시 생기면 안 되지만 위험하다고 인지하면 그 순간 당황하지 말고 정말 냉철하게 상황을 먼저 알아차리고 행동해야 함을 느꼈다. 그 캐리어 안에 있는 것이 아까워서 막 들고 나가려던 나 자신이 그리고 엄마로서 너무도 창피했다. 아이가 학교에서 안전 교육을 무척 잘 받아 온 것 같아 뿌듯하기도 했고. 그리고 나는 그 후로 여행지에서 밤에 잘 때 짐을 여기저기 풀어놓지 않는다. 그리고 제일 중요한 것, 중요한 소지품이나 여권, 지갑 등은 가방에 따라 보관해서 비상시 그것만 딱 들고 나갈 수 있게 준비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다음 숙소부터는 도착하면 비상구부터 어디 있는지 꼭 확인하는 습관이 생겼다. 정말 생각지도 못한 뒤죽박죽 정신없던 새벽이었는데 지금까지 나에게 많은 가르침을 준 특별한 하루의 새벽이었음은 틀림없다. 그 날의 추억을 모녀는 지금도 이야기하며 웃고 넘긴다. 그리고 하나 더, 아이들에게는 위험한 상황에 다른 거 다 필요없고 몸만 얼른 나가야 한다고 가르치면서 내가 실제 경험해보니 물건을 챙기고 있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경험했다는 것,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고 실제 몸으로 상황을 경험했으니 이제는 이런 상황에서는 중요한 여권과 지갑이 든 가방만은 챙기고 바로 나갈 것이라는 것~!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