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벗어나는 것이 고리타분한 노인이 되지 않는 지름길이다.
나이가 들수록 과거보다는 현재 또는 미래에 살아야 한다. 그러나 중년기에는 나와 연관된 특정한 그룹들, 직장이나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취미 모임 등 우물 안의 사람만 만나기 쉽다.
A 선배는 만나면 과거 직장에서 있었던 일과 직장 동료들의 근향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 이야기 전체의 70~80%가 과거 직장 이야기다. 직장에 있던 추억과 지나간 일들, 특히 나름대로 잘 나가던 시절의 이야기, 그리고 현재 직장 동료들의 근황을 늘어놓는다. 몇 번은 듣는데, 만날 때마다 똑같은 이야기는 짜증이 난다.
B 선배는 대기업체 사장으로 퇴직했는데 아직도 거의 그 대기업 임원들과 만난다. 그 대기업은 퇴직 임원들에 대한 대우가 남다르다. 고급 인재 이탈 방지 차원에서 모임을 지원하고 골프 부킹을 도와주는 등 각종 혜택을 많이 준다. 그러다 보니 자기 나이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활동적이고 바쁘게 살고 있다. 주말에도 약속이 꽉 차있다. 몸을 혹사하는 것이 지나쳐서 과로사하지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한다.
안전지대에 머무는 중년들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사는 그 우물은 대부분 과거 직장인 경우가 많다. 직장을 수십 년 동안 다니면서 쌓인 인맥과 추억을 먹고살게 된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그 안에서 밖을 보지 못하고 폐쇄적인 울타리 가운데에서만 사는 것이 문제다.
심리학에서는 이를 '안전지대(Comfort Zone)'라고 부른다. 익숙한 환경, 익숙한 사람들과만 어울리며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를 회피하는 심리적 영역이다. 안전지대에 머무르면 편안하지만, 성장은 멈춘다. 특히 중년기에 안전지대에만 머물면 삶이 점점 좁아지고 경직된다.
또 한 가지 울타리는 우리나라에서 특히 결집력이 강한 고등학교나 대학교 모임이다. 내가 나온 고등학교는 지방 명문고인데, 총동창회, 동기회, 재경동창회, 대학동창회, 등산 모임, 골프 모임, 탁구 모임, 반창회 등 각종 모임만 해도 8~10개가 있다. 제대로 활동하면 열 손가락이 부족할 정도다.
왜 이렇게 중년기 이후에 다양한 삶을 살지 못하고 울타리에 갇혀 사는 것일까? 그것은 울타리에 같이 있던 사람들이 친하고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과거 농경사회였고 같이 협력해서 농사를 지어야만 했다. 그런 농경문화가 기반이 되어서인지, 특히 우리나라는 인맥, 혈연, 지연이 굉장히 강하다.
회상편향의 함정
우물 안에 머물러서 좋은 점은 울타리가 외부로부터 보호해 준다는 점이다. 그래서 우물 밖에 있는 세상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고 우물 안 개구리들끼리 잘 놀고 즐겁고 태평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회상편향(Nostalgia Bias)'이라는 심리적 함정이 숨어 있다. 회상편향이란 과거를 실제보다 더 아름답고 좋았던 것으로 기억하는 경향을 말한다. "그때가 좋았지", "옛날이 더 나았어"라고 말하며 과거에 머무르는 것이다. 과거의 영광이나 추억은 소중하지만, 그것에만 매몰되면 현재를 제대로 살지 못한다. 회상편향에 빠지면 "그때 내가 잘 나갔던 시절"만 반복해서 이야기하게 되고, 현재의 자신은 점점 초라해진다.
우물 밖 세상으로
세상에는 이 우물 말고도 더 넓은 세상이 있다. 다양한 사람도 있고 다양한 취미도 있고 다양한 삶도 있다. 그것을 바라보게 되면 내 삶이 더 풍요로워지고 더 활기차진다.
한비야의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처럼 살자.
우물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다양한 사람을 만나보는 것이다. 새로운 취미 활동을 하면 전혀 새로운 사람을 만나게 된다. 특히 초등학교 동창은 삶의 스펙트럼이 아주 넓다. 대기업체 사장도 있고 시골에서 아직도 농사짓는 친구도 있다. 초등학교 동창은 다양한 삶에 대해서 솔직해질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다. 각자 자기의 삶을 거침없이 이야기하는데, 그 말을 듣다 보면 '아,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굉장히 제한된 삶이구나. 이렇게 살아가는 친구도 있구나'라고 느껴지게 된다. 이혼해서 혼자 사는 친구도 있고, 재혼해서 실패한 친구도 있고, 시골에서 인삼 농사로 성공해서 BMW를 자랑스럽게 타고 나오는 친구도 있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시집살이를 하며 떡집을 했는데 모임 때마다 떡을 나누어 주는 따뜻한 친구도 있다. 똑같은 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정말 다양하게 사는구나 깨닫는다.
고정관념을 깨는 만남들
상담을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여성 상담가들과 자주 만난다. 그런데 내가 평생 동안 생각했던 여성과 막상 만나본 40~50대 여성 상담사들은 매우 달랐다. 학회에서 중요한 직책을 놓고 서로 다투는 모습을 보면서 남자와 여자는 권력에 관한 욕망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여성들은 자식에 대해서 무한한 사랑을 가지고 있어서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자식을 위해서 희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여성을 만나면서 '아, 세상은 정말 내가 모르는 삶의 모습이 많고, 정말 다양하게 사는구나'라고 느낀다. 내 여성관이 바뀌면서 상담에서도 여성 내담자와의 소통이 훨씬 원활해졌다.
혼자만의 시간, 사색의 시간
또 한 가지는 중년기가 되면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사는 것도 필요하지만, 때로는 자기 혼자만의 사색하는 시간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혼자 산책한다든지 혼자 등산한다든지, 때로는 용기를 내어 혼자 여행하는 것도 괜찮다.
나는 사진을 찍기 위해서 가끔 혼자서 여행하는 경우가 있는데, 혼자서 여행하면 여럿이 여행하는 것과는 또 다른 행복이 있고, 나에 대해서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특히 제주도 올레길 해변가를 오랫동안 걸으면서 처음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많았지만, 나중에는 모든 생각이 다 사라지고 오로지 나 자신의 문제만이 남았던 경험이 있다.
내가 누구인가? 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내 삶은 어떠했나?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러한 자신에 대한 질문에는 답이 없다. 그러나 한 번쯤 자기 자신에 대해서 통찰해 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바쁘게 사는 현대인의 삶 가운데서 나를 돌아보는 좋은 계기가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