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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보 Sep 21. 2022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나 빼고.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20. 세상은 바쁘게 돌아간다. 나 빼고.


급한 살림 거리를 후다닥 해치우고 캠핑장으로 출발했다.

먹거리를 사기 위해 단골 마트에 들렀다. 마트 직원분들은 매대를 채우느라 바빴다. 드라이브스루 카페에 들렀다. 커피를 받으며 슬쩍 눈에 비친 창문 안이 분주하다.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오늘따라 고속버스, 화물차, 회사차가 자주 보인다. 캠핑장으로 이어지는 굽이진 시골길로 들어섰다. 앞에 먼저 가는 차가, 또는 뒤따라 오는 차가 혹시 나와 같은 행선지인가 싶었지만 모두 중간에 다른 길로 빠졌다.

캠핑장은 무척 한적했다. 강 건너에서는 무슨 축제라도 하는지 구성진 트로트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음악을 틀어놓고 한참 세팅을 하던 중에 누군가 찾아왔다. 영상 촬영 중이라 음악을 꺼달라 양해를 구해오셨다. 머쓱해져서 음악을 껐다.

세팅을 마치고 맥주 한 캔을 마시며 캠핑장 전경을 친구들과의 단톡방에 올렸다. 숫자와 글자로 빼곡한 모니터 사진이 돌아왔다.

오랜만에 야구를 틀었다. 시즌이 막판이어서인지 못 보던 신인들의 출장 빈도가 높다. 스윙 한번, 투구 한번, 그 사이사이에 보이는 표정에서 간절함이 비쳤다.

한참 식사 중에 길고양이가 찾아와 절절하고 앙칼지게 울었다. 던져주는 고기를 연신 받아먹는다. 한참 주는 데로 받아먹더니 양이 다 찼는지 단호히 갈 길을 떠났다.

장작은 뜨겁게 또 바쁘게 타올랐다. 불이 끊기지 않게 장작을 넣는 손이 바빴다.

장작 연기를 마셔서일까 문뜩 머리가 어지럽다. 내가 오늘 뭐 하러 왔지? 쉬러 왔다고? 내가 왜? 뭘 했다고 쉬어? 내가 그럴 자격이 있나?

세상이 나 빼고 바쁘게 돌아간다. 상대성 이론이 나와 세상 사이에 작동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과연 언제가 되면 이 시차가 따라잡힐까. 마치 빠르게 달리는 기차를 쫓아 올라타야 하는 신세 같다. 절박함, 조바심, 공포감 등이 교차한다. 지금의 하루하루가 미래의 발돋움을 위한 밑 작업일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는다.

오늘은 스스로에게 해줄 위로의 말조차 떠오르지 않는다. 내 삶을 합리화 할 당위가 떠오르지 않는다.

오늘따라 술에 손이 가질 않는다. 잠자리에 들고싶지 않다.


※ 오늘의 잘한 일

- ......피칭 30분 만에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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