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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웅보 Sep 22. 2022

감정 솎아내기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비자발적 전업주부의 우울   


21. 감정 솎아내기      



고요한 캠핑장. 모닥불 외에는 그 어떤 광원도 보이지 않을 시간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 감정과 마주 앉았다. 자 끝장을 보자. 이 이상 업무에 태만할 수는 없다. 전업주부라고 철밥통은 아니란 말이다.   


감정을 솎아내기로 한다. 어느 것이 당위가 있고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은지. 어느 것은 타일러야 하고 어느 것은 단호히 대해야 하는지.      



우울함에는 그것을 일으키는 대상, 상황 등의 원인이 있고, 그것이 우울함으로 발현되게 만드는 근원적 욕구가 존재한다. 명절이 지나고 내가 우울해진 이유는 여전히 사회적으로 안정되지 못하여 가족들 앞에 떳떳하지 못하고 자신이 부끄러워서였다. 여기에는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성공하고 싶다는 욕구, 가족을 부양하고 지원하고 싶다는 욕구, 그러한 욕구 실현을 통해 자존감을 충족시키고 싶다는 욕구가 작용한다.   


우울함의 원인과 그 뒤에 숨은 욕구가 확인되었다면 이제는 그 욕구의 속성을 검토해야 한다. 자신이 동의하고 원하는 욕구인지, 외부로부터 주입된 욕구인지.


상기 욕구들은 헤테로 남성성에 의해 강화되거나 색채가 달라지기도 하지만, 남성성을 소거시킨다고 해서 이 욕구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엄연히 사회,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향하는 행복의 형태가 있고 그 행복을 공유하고 싶은 이들이 있는 이상 당연한 욕구이자 책임감이다.   


검토 결과 욕구에는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이것이 왜 하필  지금 우울감에 작용하였는가 살펴보아야 한다.      


욕구는 실현을 위해 필요한 시간과 노력의 양에 따라 분류할 수 있다. 현재 나는 전문직업 자격 취득을 위해 대학원 진학과 자격증 취득에 도전 중이다. 당연히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실현 시기가 먼 것에 따른 조급함, 실현 가능성에 대한 불안함, 지금 당장 성취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 등은 무척 자연스러운 감정이다.   

반면 진로를 결정했을 때 이미 검토된 것들이 시간이 지나고 의지가 약해지면서 다시금 떠오르기도 한다. 상대적으로 늦은 나이에 대한 걱정. 소모되는 시간과 비용에 대한 걱정. 그 시간 동안 가족들에게 느낄 미안함.   

막상 따지고 보니 어느 하나 허투루 돌려보낼 감정이 없다. 하나하나 돌봐주고 타일러줘야 할 것들 뿐이다. 다행인 것은 새로운 우울 거리는 없다는 것. 잠재된 것들이 나약해진 마음 틈을 비집고 나왔을 뿐이다. 그렇다면 처방도 과거 사례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      



위로받았던 기억, 응원받았던 기억, 믿음을 받은 기억. 놀라운 점은 우울함의 기원이 여전히 과거에 기인하는 반면, 지지받은 기억들은 끊임없이 갱신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 나이에 못 할 건 키즈모델과 고등래퍼 빼곤 없다는 애인님의 말씀. 여전히 그 시절 그 모습으로 웃고 떠들었던 친구들과의 얼마 전 모임. 그중에도 가장 큰 위로는 이번 명절에 얻은 기억이었다.   


이번 명절에 애인님의 어머님과 긴 대화를 나누었다. 내가 세상에서 흔히 기대하는 사위 다운 역할은 하기 어려울지도 모르겠다는 것. 어지간해서는 애인님의 수입이 항상 나보다 높을 것이고, 또 웬만해서는 내가 살림도 잘할 터. 더군다나 내가 안정적인 궤도에 오르기까지 앞으로 시간도 꽤 걸릴 거라는 거.   


애인님과 나 사이에서는 충분한 소통을 통해 합의에 달았지만, 가족들에게는 여전히 말하기 어려운 사실을 술기운을 빌려 조심스레 고백했다.   


어머님의 대답에는 그다지 긴 공백도 없었다. 많은 말씀을 해주셨지만 요약하자면 나의 노력을 믿고, 우리의 삶의 모습을 존중한다는 것. 이번 명절의 가장 큰 기쁨이었다.      


오늘 따라 술에 손이 가지를 않았는데. 생각을 여기까지 마치고 나니 독주 한잔이 당긴다. 마침 장작도 다 타 간다. 잠자리가 따뜻할 것 같다.


※ 오늘의 잘한 일

- 감정을 다그치지 않고 잘 타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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