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 마음 편히 2년 다녔으면 됐지.
폭풍 같던 중2 1학기가 지나갔다.
일진무리들은 더 이상 J에게 큰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몇몇 J의 행동을 따라 하는 못된 놈들은 아직도 있었지만 J는 무시하기로 했다.
본인 스스로가 이 정도의 괴롭힘과는 합의한 듯하였다.
그런 J를 보며 마음이 안쓰러웠다.
이제는 나도 매일같이 J에게 괴롭히는 아이가 없는지 묻지 않기로 했다.
그저 힘들 때는 엄마가 옆에 있으니 무슨 이야기를 해도 된다는 창구만 열어 두기만 하기로 했다.
이런 것이 이은경작가의 다정한 관찰자가 되는 과정일까?
2학기에는 다행히도 J에게 다가오는 아이들도 있었다.
스포츠시간에는 마음 맞는 아이들끼리 보드게임을 했다고 한다.
1학기에는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보드게임을 하는데 J만 혼자 블록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엄마, 나도 친구가 생긴 거 같아요. "
정말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어? 어떻게 친구가 되었는데?"
"스포츠시간에 애들이랑 보드게임을 했는데 보드게임 규칙도 가르쳐주고 내가 계속 지니까 한 번은 이길 수 있게 도와주기도 했어요. "
"오 정말? 그 친구들 이름은 알아?"
"아니요."
"J야, 친구들끼리는 이름을 불러야 하니까 다음번에 이름을 적어와 봐"
J는 다음 수업시간에 이름을 적어 와서 알려주었다.
오목도 하고 우노라는 보드게임도 하였다며 신나게 설명해 주는 J를 보니 본인을 이해하고 배려하는 사람을 만나 얼마나 저렇게 놀고 싶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까지 J는 보드게임시간에 3명 더 친구를 사귀어 여러 가지 보드게임을 하고 있다.
특이한 점은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사귄 친구들이지만 보드게임시간 외에는 만나지 않는다.
그저 그 시간에만 함께 할 뿐이었다.
J도 그 이상 친한 것은 무리라고 하였다.
J는 학교에서 뮤지컬 공연을 한다고 했다.
아직 2개월도 더 남은 상황이었다.
J는 버스 운전사역할을 맡았다며 열심히 대본 연습을 하였다.
"엄마 공연 보러 올 거지?"
"그럼, 가야지 엄마가 동영상도 찍어줄게"
말은 간다고 했지만 회사 특성상 월차, 연차를 내는 것이 어려웠다.
대체인력이 마땅히 없기 때문에 한 달 전에 연, 월차를 내야 했다.
J의 학교폭력상황에서도 대처할 때 여간 불편한 것이 많았다.
결국 학폭신고를 하지 않고 넘어가긴 했지만 불안요소가 아직은 많았다.
심지어 엎친데 덮친 격으로 친정엄마도 뇌경색으로 쓰러져 먼 거리를 왔다 갔다 병간호에 지쳐만 갔다.
퇴사해야겠다는 마음이 확고 해졌다.
이제는 방전이 되었다.
'그래, 마음 편히 2년 다녔으면 됐지.'
이제는 몸과 마음에서 사인을 보내는 듯했다.
숨이 꼴까닥 넘어갈 듯 시험공부시키랴, 친정엄마의 병간호, 세 아이의 케어문제까지 퇴사의 이유는 많았다.
사실 경단녀로 14년간 지내다가 코로나 때 우연히 딴 사회복지사로 여기 회사에서 2년 경력까지 만들었으면 만족한다. 경력은 사라지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다행히도 사회복지사는 50대 근무자들이 많다.
아직은 50대가 좀 남았기에 나는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쉬기로 했다.
막상 회사를 그만두어도 아이들이 세명이니 바쁘기는 매한가지이다.
그래도 회사를 다닐 때 보다 마음에는 조그마한 숨구멍이 생겼다.
그래도 편한 마음으로 아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쌓아두었던 살림살이도 조금씩 하였다.
다시 운동도 시작하였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운동을 하는 건 정말 뒷전이 되어 체력이 바닥난 지 오래였다.
조금만 오래 걸어도 무릎이 아파서 앉을 곳부터 찾기 시작하였다.
늘어난 체중과 거칠어진 피부는 나이가 든 만큼 빠르게 회복하기는 어려웠다.
코로나 때 어떻게 매일 등산을 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다들 상처는 성장의 밑거름이라고 한다.
하지만 너무 깊은 상처는 결국 트라우마를 남긴다.
부디 J가 그 상처가 트라우마로 남지 않고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아 잘 자라길 바랄 뿐이다.
너무 힘들 땐 엄마의 그늘에서 쉬기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