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은 있었지만, 감정은 없었다
그는 “미안해”를 참 자주 말했다.
물처럼 가벼웠고, 바람처럼 빨랐다.
나는 그 두 음절을 믿었다.
그 속에 온기가 실려 있을 거라 믿었다.
그래서 착각했다.
사과라는 얇은 껍질 속에,
감정을 끝까지 품은 사람이라고.
뒤돌아보면, 누군가는 물을지도 모른다.
“그는 사과했는데, 너는 무엇이 못마땅했느냐”고.
“혼자 괜한 심연을 판 건 아닐까”라고.
그러나 감정을 흉내 낸 말은,
진짜보다 더 깊숙이 베인다.
사과는, 마음을 꺼내 들고
그 떨림을 끝까지 감당하려는 결심이지,
상황을 덮어두는 얇은 덮개가 아니니까.
어떤 사과는 마음을 열고,
어떤 사과는 마음을 닫는다.
그에게 사과는, 상황을 넘기는 말이었다.
말은 있었지만, 감정은 없었다.
나는 관계에서 불편함이 생기면
말하고, 풀고, 다시 가까워지려 했다.
상처가 되었다면 사과했고,
불편함이 있다면 바로 풀었다.
사과는 책임이었고, 진심이었다.
사과는 혼자 꺼내는 말이 아니라,
두 마음이 맞닿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약속이다.
그도 나처럼 불편했을 순간이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감정은,
감춘다고 해서 닿는 법이 없다.
마음속 감정이
말이라는 다리를 건널 때,
사과는 그때 시작된다.
어느 날,
내가 모임 자리에서 실수를 한 적이 있다.
마음에 걸려 다음 날 아침,
정중히 전화를 걸어 사과했다.
그때 그는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다가 말했다.
“그렇게 사과하는 거, 쉬운 일 아니야.
그거 진짜 멋있는 거야.”
나는 믿었다.
그도 감정을 마주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말뿐인 사과가 아닌,
감정을 감당할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연애 중, 그가 사과해야 할 일이 생기면
그는 “미안해”를 습관처럼 반복했다.
그러고도 내가 여전히 서운해하면,
오히려 그가 화를 냈다.
그의 “미안해”는
사과의 끝이 아니라,
내 자책의 시작이었다.
말은 고개를 숙였지만,
그 끝엔 늘
“나만 잘못한 건 아니잖아”가 따라왔다.
그건 사과가 아니었다.
감정은 덮고,
책임은 나눠버리려는 말이었다.
때로는 명령처럼 들렸다.
“됐지?”
“이제 그만하자.”
그 말들은 감정을 멈추라는 통보였다.
그의 말은 사과의 모양을 하고 있었지만,
감정은 빠져 있었다.
며칠 전, 무심코 짐을 정리하다가
카드 더미 속에서 그의 오래된 편지를 발견했다.
한 번 크게 다투고,
잠시 거리를 두던 시기의 흔적이었다.
휴게소에서 사온 먹거리에
짧은 손편지를 붙여두고 떠났던 날이었다.
편지를 열어보니,
“후회하는 모습이 바보같지만,
미안하다는 말 밖에 할 수가 없어. 잘지내.”
라는 말뿐이었다.
얼굴을 마주할 용기도,
상황을 풀어낼 말도 없이 남긴 짧은 변명뿐이었다.
그때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그가 남긴 건 감정을 꺼내려는 말이 아니라,
불편함을 넘기려는 말이었다.
그도 어떤 감정을 품고 있었을지 모른다.
다만 내가 마주한 건,
감정을 꺼내지 않는 방식이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사과조차 희미해졌다.
말도, 대화도 사라졌다.
돌아보면,
그는 애초에 변화를 시도할 이유도,
필요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나는 불편함을 풀고자 움직였지만,
그는 불편함을 넘기며 머물렀다.
어쩌면 그도 불편했을지 모른다.
다만 그는 그 불편함을 마주하기보다는
넘기는 데 더 익숙했다.
사과도 갈등도, 끝까지 직면하기보다는
되묻고 덮는 쪽을 택했던 것 같다.
결국 이 관계는, 내가 감정을 이어가고,
그는 그 흐름을 끊어내며 유지됐다.
그는 후회의 말을 남겼지만,
감정을 꺼내려는 시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같은 언어를 쓰는 듯 보였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감정 구조 위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단어는 같았지만, 의미도 방향도 달랐고,
그 차이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 뚜렷해졌다.
이별한 그날 새벽, 그는 나를 붙잡겠다고
내 집 앞까지 찾아왔다.
4시간 가까이 대화를 나눴지만,
그 말에 담긴 마음이 무엇이었든,
그날의 감정은 내게 끝내 닿지 않았다.
그날, 나는 책임을 묻고 싶지 않았다.
마음이 남아 있다면,
그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다.
감정을 말할 준비가 된 사람과
마주 앉아 대화를 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되물었다.
“너도 잘못한 거 있는 거 알지?”
그 말은 사과가 아닌, 심문이었다.
그의 표정엔 여유라고 보기엔 낯선 기색이 스쳤고,
말투엔 따지듯 되묻는 냉기가 맴돌았다.
그는 붙잡으려 온 것이 아니었다.
감정을 나누는 사람은,
과거의 잘잘못보다 지금의 마음을 바라본다.
그건 감정이 아니라,
결론을 내리기 위한 말이었다.
그가 꺼낸 건,
이미 몇 계절을 지난 이야기였다.
그날은 내가 참석한 술자리였다.
모임 말미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의 남자 지인이 잠시 들렀다.
나는 그 이야기를 다음 날 아침,
그에게 전하며 사과까지 건넸다.
혹시 불편했을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괜찮다는 말도, 불편하다는 말도 없이
그날의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오히려 한참 뒤,
“그 모임 사람들 언제 또 만나?”라고
가볍게 물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날이 되어서야
마치 내가 무언가를 숨긴 사람처럼
그 이야기를 꺼내며 내 반응을 문제 삼았다.
사과가 필요한 순간이었던 건 그였지만,
되묻기만 반복했고,
결국 대화는 화해가 아닌 책임 전가로 끝났다.
나는 감정을 풀려 했고,
그는 불편함을 넘겼다.
결국, 우리는
감정을 다루는 방식부터 달랐다.
사실,
사과할 필요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건넸고,
그는 그것을 ‘잘못의 증거’로 기억했다.
그때부터,
오해는 감정이 아니라 무기가 되었다.
그 대화는 화해가 아니라 폐장이었다.
그 작은 차이는,
우리가 감정을 감당하는 방식이
서로 얼마나 달랐는지를 보여주는 경계선이었다.
우리는,
사과조차도 다르게 배운 사람들이었다.
말보다 오래 남는 건
결국 끝내 꺼내지 못한 감정이었다.
감정은 말을 기다렸고,
말은 끝내 감정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끝내 사과되지 못한 말들 속에서 서로를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