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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따뜻함을 떠나는 일

한 사람보다 넓은 이별

by 정민

나는 그의 부모님을 좋아했다.


몇 번의 만남뿐이었지만,

그 따뜻함이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어떤 날엔 그의 손에

작고 조용한 선물을 쥐어 보내주셨고,

내가 아프다고 하면

항상 멀리서 걱정의 말을 전해주셨다.


대단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 모든 작은 진심들이

나에게는 쉽게 잊히지 않는

온기로 남아 있다.


처음 만남은

그의 부모님이 준비한 자리였다.


따뜻한 조명 아래

정갈하게 차려진 식탁에서,

아버지는 손수 여러 맛의 음식을 내어주셨고


어머니는 좋아하는 맥주를 꺼내

함께 나누셨다.


도란도란 웃으며 저녁을 보내다

그날은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노래방까지 가서

함께 노래를 부르고,


내가 그 가족 안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날 어머니는 노래가 끝난 뒤

내 얼굴을 조용히 감싸며 말씀하셨다.


“정민아, 너무 예쁘다. 예뻐.”


단지 겉모습을 말하는 것 같지 않았다.


그날 내가 내뿜었던 분위기,

긴장 속에서도 밝게 웃던 태도,

그 모든 것을 품에 안아주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 순간,

나는 정말로 그 가족의 안으로 들어간 기분이었다.


나는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 가족의 따뜻한 분위기,

스스럼없는 농담과 대화,

서로를 향해 마음을 열어놓고 있는

그 공기가 참 좋았다.


그가 조금 부족하더라도,

이런 가족이라면 미래를 그려봐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나는 그런 이야기를

지인들에게도 종종 했었다.


물론 그 미래는

결국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지만.




그의 가족들은 나를 조심스럽고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여동생은 나를 보며

“가족이 되어주면 좋겠다”고 했고,


누나는 나보다 어렸지만

오히려 더 단단하고 살가운 사람이었다.


“언니, 내 동생이 부족하니까,

혹시 잘못한 거 있음 꼭 나한테 말해요.

내가 대신 혼낼게요.”


그 말은 나에게 든든한 빽처럼 느껴졌지만,

정작 나는 그걸 한 번도 이용하지 못했다.


그의 누나는 종종 해외를 다녀오는 일이 있었는데,

돌아올 때마다 내게 작은 선물을 건네주곤 했다.


내가 해준 일은 그를 만나는 것뿐이었다.


그 마음이 부담스럽기보다,

오히려 나에게 더 큰 책임감을 안겨주었다.


이 관계를 허투루 다룰 수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단지 그 사람 하나를 만나는 게 아니라,

그가 속한 세계를 통째로 안고 있다는 감각이었다.


나를 딸처럼 여겼다고 말할 순 없지만,

그 순간만큼은 나라는 사람을 조심스럽게 맞아주셨다.


어색할 법한 첫 만남에서도 나는 긴장하지 않았다.


그들의 따뜻함은 억지스러운 친절이 아니었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느낌이었고,

그 안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마음을 열 수 있었다.


어쩌면 그 작은 따뜻함이,

이 관계를 조금 더 믿어보게 만든 이유 중 하나였는지도 모른다.




내 생일이 다가오던 어느 날,

그의 부모님은 그에게

조심스레 용돈을 쥐어주셨다고 한다.


“생일이니까, 밥이라도 맛있는 거 사줘라.”

하지만 그는 그걸 끝내 받지 않았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그 따뜻함이 다시금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가 받지 않은 그 손의 진심마저,

나는 오래 기억하고 싶었다.


누가 주는 마음을 받지 않기로 선택한 건 그였지만,

그 마음을 진심으로 감사히 여긴 건 나였다.


나는 그 사람을 좋아했지만,

그의 집과 가족까지 아꼈다.


그의 부모님은

언제나 멀리서 나를 응원해주셨다.


“몸은 괜찮으냐”, “늘 조심해라”, “고맙다”

같은 짧은 말들이었지만, 그 말들이 내게는

‘내가 이 관계 안에 소중히 여겨지고 있다’는 증거처럼 느껴졌다.


그래서였을까.

이 관계가 흔들릴 때,

나는 그 사람보다 그 사람의 부모님 생각이 먼저 났다.


내가 상처받고 지쳐 있을 때조차,

그분들에겐 죄송한 마음이 앞섰다.


헤어지던 날, 나는 꼭 전해달라고 했다.


“어머니, 아버지, 그리고 할머니께 감사했다고.

그동안 예뻐해주셔서 정말 감사했어요.”


나는 그 안에서 진심으로 품어졌다고 느꼈다.


그리고 그 품을 떠나오는 건,

한 사람을 잃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상실이었다.


이제 그 따뜻함은

나의 일상 곳곳에서 작은 불씨처럼 남아 있다.


그때 배운 온기는 내 삶의 한 결이 되어,

내가 다른 이들을 대하는 방식을 천천히 바꾸고 있다.


그 온기를 품은 채,

나는 오늘도 나의 삶을 천천히 키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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