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속도로 살아간다
우리는 끝났지만, 내 하루는 멈추지 않았다.
이제는 기다리지 않는다.
누군가의 발걸음을,
누군가의 마음을.
내 하루는 오롯이 내 것부터 시작된다.
혼자가 된 첫날, 집 안의 공기가 낯설게 울렸다.
무언가를 켜두지 않으면 방이 비어 있는 듯했고
정적은 작은 숨소리까지 크게 반사시켰다.
그때 처음 알았다.
고요가 이렇게 크게 들릴 수 있다는 걸.
해가 막 떠오르기 전, 집 근처 천변을 걷는다.
차가운 공기가 피부를 스치면 몸이 먼저 깨어난다.
빠르게 걷다가 마음이 멈추라는 신호를 보내면
벤치에 앉아 강바람을 마신다.
이 시간은 누구의 것도 아닌, 온전히 나의 시간이다.
그로 채워졌던 시간들이 이제는 나를 돌보는 시간으로 바뀌었다.
전화벨이 울리지 않아도,
누구의 발자국이 뒤따르지 않아도
내 하루는 조용히 흘러간다.
주머니 속 진동에도 더이상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어딜 갈 때마다 일일이 행선지를 알리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하루를 훨씬 가볍게 만든다.
내가 혼자 보내는 시간은
억지로 누군가를 잊기 위한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흔적을 지우려 애쓰는 것도 아니다.
그저 내가 나를 다시 만나는 일,
내 안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일이다.
기억을 지우려는 노력이 아니라
나를 더 선명히 이해하기 위한 선택이다.
이별이 나를 멈춰 세울 줄 알았던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삶은 더 활기를 띠었다.
이제는 억지로 무언가를 먹거나 시간을 내지 않아도 된다.
말하지 않으면서, 해주지 않으면 서운해 하는 그런 상황도 없다.
만남 또한 선택이 되었다.
감정이 통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는 이어가고,
내 마음이 닫히는 자리에는 잠시 머무르지 않는다.
감정을 표현한다는 건,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라
나를 존중하는 일이라는 걸 이제 안다.
감정을 다룰 줄 알고,
서로의 온도를 조율할 수 있는 관계만이 지속된다는 것도 배웠다.
그는 가까운 친구에게도, 부모에게도
본인의 감정을 털어놓지 않는 사람이었다.
중요한 순간마저 말을 아끼며,
결국 침묵으로 마무리하곤 했다.
처음엔 서툴러서 그럴 거라 생각하며 기다렸지만,
그것이 그의 방식이었음을 깨닫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상대를 변화시키려는 노력 대신
내 감정을 지키는 연습을 조금씩 해 나갔다.
누구의 마음을 붙잡으려 애쓰는 대신
내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별은 갑작스럽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서로의 세계에서
조용히 물러나고 있었다.
그가 흘린 늦은 눈물은 미안함이었을 뿐
우리 사이를 붙잡을 힘은 아니었다.
나는 그 눈물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 관계는 내게 많은 것을 남겼다.
무너진 적은 없지만, 상처를 외면하지도 않았다.
왜 감정이 닿지 않았는지, 왜 내가 끝없이 설명해야 했는지,
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나는 천천히 나를 확인해 갔다.
감정은 줄이는 것이 아니라
서로가 함께 나눌 때 관계가 된다는 것,
그 단순한 진실을 몸으로 배웠다.
이제는 하루가
남의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내가 스스로 세운 리듬이 나를 지탱한다.
나는 더이상 누군가가 돌아오길 바라지 않고,
누군가가 내 빈자리를 채워 주길 기다리지도 않는다.
지금의 나는 나를 채우는 사람이다.
주변에서는 종종 말한다.
“이젠 다른 사람도 만나봐야 하지 않겠냐”고.
쉬지 말고 새로운 인연을 찾으라고.
하지만 억지로 인연을 찾아 나설 생각은 없다.
지금은 나를 더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이 먼저다.
내 인연은 내가 준비됐을 때,
내가 원하는 자리에서 찾아올 것이다.
이 길을 걷는 동안 누구나 잠시 주저앉을 수 있다.
하지만 잠시 멈춘다고 해서
삶이 끝나는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우리는 무너질 수 있지만
그 자리에서 다시 일어설 수 있다.
내가 오늘 걷고, 숨 쉬며 내 하루를 쌓아가는 일.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앞으로도 내 시간의 속도를 타인의 리듬에 맞추지 않을 것이다.
오늘의 이 발걸음이 내가 살아갈 방식이며,
앞으로도 나를 지키는 가장 확실한 선택일 것이다.
사랑이 언젠가 찾아온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오늘의 나는,
나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일로 이미 충만하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나의 하루를 스스로 완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