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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나는 다시 말한다

말이 닿는 자리에서, 관계가 시작된다

by 정민

이해하려 애썼던 시간이,

사실은 나를 잃어가던 연습이었을지 모른다.


이 말을, 끝내 의미를 붙잡으려 했던 당신에게 전한다.


관계 속에서 그는 말을 삼켰고,

나는 그 침묵 속에서 끝내 답을 기다렸다.


침묵은 처음엔 배려처럼 보였다.

말이 적은 사람은 사려 깊고, 감정을 아끼는 사람은 성숙해 보였다.


나도 그렇게 믿었다.

말이 없는 쪽이 오히려 타인의 마음을 잘 듣는 사람이라고.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알게 되었다.


그 침묵은 이해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 세계 안에 머무르는 안온함이었다.


침묵하는 사람은 듣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이미 해석을 끝낸 상태였다.

질문하지도, 확인하지도 않은 채

자기 판단 안에서 타인을 정리해버리는 사람들.


그런 침묵은 상대의 마음을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관계의 울타리를 조금씩 허무는 일이었다.


말이 닿지 않는 사이, 오해는 자라나고 그 침묵은 점점 벽의 형태를 띠었다.

나는 그 벽을 이해하려 애썼고, 그 이해의 시도 속에서 스스로의 감정까지 해석당하는 경험을 반복했다.


침묵은 말을 아낄 때만 빛을 발한다.

말을 삼키는 순간이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조율하기 위해 멈출 때에만 의미가 있었다.


그러나 그 침묵 속에서 내 감정을 존중하지 못하고

상대의 눈치를 보기 시작한 순간부터 관계가 서서히 무너지는 것을 느꼈다.

그건 공허나 불안 때문이 아니라, 감정을 나눌 수 없다는 감각 때문이었다.


그 시절, 우리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을 속였다.

“남자는 원래 그렇다, 여자는 그렇다.”

그렇게 말하면서 불편을 합리화했다.


혹은 “그것 빼면 좋은 사람이야.”

그 한마디로 진실의 무게를 덮었다.

그러나 그 말들은 진심을 밝히는 언어가 아니라,

태도의 무게를 가리는 가벼운 변명이었다.


관계를 지탱하는 건 서로를 대하는 태도의 깊이였다.


우리는 서로를 이해하려 애썼지만,

말이 닿지 않는 순간마다 관계는 조금씩 어긋났다.


침묵은 성숙이 아니라 회피였고,

진정한 성숙은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말하려는 용기였다.


침묵하는 사람 곁에 선 이들은

결국 그 침묵을 해석하며 관계를 이어간다.

그러나 그 해석이 쌓일수록,

침묵은 말보다 더 많은 오해를 낳는다.


말하지 않는 쪽의 감정을 대신 해석하는 동안,

말하는 쪽의 감정도 타인의 시선 안에서 해석당하게 된다.


감정을 표현하는 용기야말로

관계를 존중하는 가장 단단한 방식이었다.


말이 없는 사람은 평온해 보일지 몰라도,

그 평온은 종종 감정의 불능에서 비롯된다.

감정을 말하지 않는다는 건 자신을 숨기고, 타인에게 닿기를 포기하는 일이다.


나는 그 침묵을 이해하려 애쓰던 사람으로 남지 않겠다.

이제는 서로의 언어가 오가는 관계,

감정이 말로 건너가는 관계가 건강한 관계임을 안다.


이제 더 이상 지난날의 이야기를 되돌아보지 않는다.

그 자리에 남은 건 그가 아니라, 나였다.


남이 만들어 주던 리듬 대신

내가 정한 속도가 내 하루를 이끌었다.


저녁이 오면 스스로에게 물었다.

오늘의 너는 어떤 호흡으로 살아 있었느냐고.


그 질문에 대답을 찾는 시간이,

관계 속에서 침묵을 감당하던 때보다 훨씬 선명했다.


혹시 지금도 누군가를 붙잡으며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관계를 멈추어도 괜찮다고 말해주고 싶다.


멈춤은 패배가 아니었다.

고독은 결핍이 아니었다.

멈춘 자리에서 우리는 다시 존재하게 된다.


당신이 버티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분명히 있다.

끝내 붙잡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다.


손끝이 닿지 않아도, 마음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관계의 끝은 부재가 아니라, 회복의 시작이었다.


이 책을 덮는 지금,

어떤 이에게는 여전히 침묵이 두려울지 모른다.

혹은 덮어 둔 채 새로운 이야기를 써 내려갔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그 적막은 당신을 삼키는 침묵이 아니라, 당신이 다시 태어나는 자리다.

누군가의 시선이나 말이 없어도 당신의 하루는 이미 충분하다.


숨을 고르고, 천천히 걷고,

스스로의 말을 들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이미 당신은 서 있는 것이다.


긴 터널 같은 침묵을 지나면서, 나는 잃었던 말을 다시 건졌다.

끝내 대답하지 않은 시간 속에서도, 나는 결국 나를 되찾았다.


혼자의 시간은 비어 있지 않았다.

그곳에서 나는 다시 나를 일으킬 수 있었다.


혹시 당신이 오늘 저녁 혼자 밥을 차려 먹고,

집에 돌아와 불을 켜며 작은 숨을 고르더라도,

그 순간은 결코 공허가 아니다.

누구에게 보이지 않아도,

스스로를 돌보는 그 작은 몸짓 하나가

당신의 삶을 단단히 지탱하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 다시 존재할 것이다.

그것은 기다림의 보상이 아니라,

자기 언어를 잃지 않은 사람이 맞이하는 또 하나의 시작이다.


우리가 지나온 시간 속에서,

당신도 어쩌면 나처럼

자신의 목소리를 되찾고 있을지 모른다.


그 목소리가 서로에게 닿을 수 있다면,

침묵은 더 이상 두려움이 아니다.


책을 덮는 지금, 나는 묻는다.

오늘의 당신은 어떤 마음으로 서 있었는가.

그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당신의 이야기도 이미 시작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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