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작정하고 오래 걸으러 나왔다. 얼마나 걸어질지 모르지만 한탄강부터 선자령까지 걸었던 기억이 걷기라는 심지에 불을 붙인 느낌이다. 가끔 왔던 소금강산을 오르자는 신랑. 몸을 예열해서 등산을 시작하자고 처음 가보는 길로 안내했다.
가을이면 노란 부채를 펴고 아름다움을 뽐내던 은행나무숲을 지나는 길이었다. 도리마을, 운곡서원만큼 알려지진 않았지만 이곳 또한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곳이다. 알려진 맛집 말고 현지인이 추천하는 맛집처럼 알려지지 않은 은행나무맛집이다.
잎이 다 떨어진 은행나무지만 하늘로 곧게 솟은 나무들은 내 눈을 즐겁게 해 주기에 충분했다. 가을에 꼭 다시 오겠노라 다짐해 본다.
부대가 보였다. 부대 앞 전차가 눈길을 끌었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전차구경에 나섰다. 81년생, 우리와 전차는 동갑내기였다. 왠지 모를 반가움이 더해졌다. 신랑이 부르길래 가봤더니 포구에 새 둥지가 있었다. 이곳을 삶의 안식처로 쓰다니, 놀랍고 신기했다. 한참 전차를 두리번거리다가 인사를 나누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경주시 동천동에서 용강동으로 넘어가는 뒷길이었다. 도로옆으로 자전거도로처럼 여유 있는 길이 있어서 나란히 걷기에도 충분했다. 산과 산사이에 난 도로를 따라 걷다 보니 아파트가 보인다. 이제는 산을 올라야 한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소금강산 등산로 입구가 보인다. 남산에 비교하면 낮은 산이기에 두려움은 덜했으나 눈앞에 펼쳐진 오르막길은 결코 반갑지 않았다. 신랑뒤를 쫄래쫄래 따라가 본다. 가끔씩 허리도 펴가며 한 발 한 발 옮겨본다. 흙길과 나무 계단을 오르다 보니 반가운 평지도 나왔다. 이제 쭉 능선만 따라가면 된다는 생각에 가뿐한 마음으로 산을 탔다.
"여기였구나! 여기 있었네"
지난번 등산 때 이곳을 오고 싶었는데 못 찾아서 아쉽게 발걸음을 돌린 적이 있었다. 누군가의 정성과 헌신으로 달력을 넘기듯 매일 숫자가 바뀌어있다. 소금강산의 포토존이라 해도 손색이 없는 장소다.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고 서둘러 움직였다. 이 사진 한 장만으로 오늘 할 일은 다 끝낸 것처럼 뿌듯했다.
삼존마애불좌상
산 능선에는 경치를 보며 할 수 있는 운동기구도 있었고, 조금 더 내려오니 삼존마애불좌상도 있었다. 경주에 있는 산마다 이런 불상들이 있는 것을 보면 지붕 없는 박물관이란 말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경주에 살아서 기분 좋았던 순간이다.
산을 타고 내려왔는데 능선하나를 덜 넘어서 하산했다. 내려왔더니 석탈해왕릉과 표암재가 있다. 석탈해왕릉은 신라 제4대 왕의 묘이고 그 옆엔 제사를 지내던 숭신전이 있다. 소금강산의 남쪽자락에는 밝은 바위, 일명 박바위라고도 불리는 표암이 있다. 표주박을 엎어놓은 것 같다 해서 붙어진 이름이다. 경주 이 씨 시조 이알평이 하늘에서 이곳으로 내려왔다고 전해진다. 이곳은 신라의 화백회의가 열린 4 영지 중 한 곳이기도 한데 이곳에서 6 촌장들이 모여 건국회의를 열고 박혁거세를 신라의 초대왕으로 추대했다고 한다. 진한 6촌 화백회의의 의장이 경주 이 씨 시조 이알평이었다.
멀리보이는 박바위
박바위와 표암재
나무사이로 보이는 석탈해왕릉
등산 후 상쾌한 기분과 역사이야기까지 더해지니 가슴이 두배로 벅차올랐다. 역시 운동은 많은 것을 선물한다.
걷다 보니 점심때가 훌쩍 넘었다. 보문 숲머리마을에 있는 국수맛집에 가서 국수 한 그릇씩 먹으며 오후 일정을 결정하기로 했다. 비리지 않은 구수한 멸치육수에 몸을 담근 면발은 도망간 입맛도 불러온다. 역시 맛있다. 운동 후 먹는 음식이라 그런지 더욱 꿀맛이다. 뜨끈한 국수 한 그릇으로 허기도 달래고 휴식도 취했으니 더 걸어보자고 입을 맞추었고 보문호반길로 향했다.
보문호수
여전히 얼음도 많고 바람도 불지만 많이 따뜻해졌다는 걸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햇볕은 따사로웠다. 바람이 막힌 곳은 여지없는 봄이다. 밥도 먹었겠다 벤치에 누워 잠시 눈을 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보문호반길 한 바퀴를 다 돌아갈 무렵, 신랑도 나도 걷는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20km는 거뜬히 걸어야 되는데" "15km면 많이 걸었다 아이가~~ 훌륭하다"
발바닥이 아프고 허리도 아파왔지만 마음하나만큼은 뿌듯했다. 서로를 칭찬했다. 간식도 못 먹고 국수 한 그릇 먹은 게 다지만, 발이 아프고 다리가 남의 다리 같지만 끝까지 최선을 다한 오늘이었으니까.
"다음번엔 어디를 걸까? 정말 포항으로 가볼까?"
힘들었지만 들뜬 신랑의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된다.
"가자, 가보자~어디든 실컷 걸어보자"
걷기가 하루에 일부분으로 자리 잡게 된 것 같아 좋기도 하고, 몸도 마음도 조금씩 바르게 자리 잡히는 것 같아 행복해지기도 한다. 그 행복은 누가 만들어 주는 게 아니었다. 내가 만든 것이다. 누워서 하는 쉼도 필요하지만 운동화를 신는 용기도 필요했다.
나는 오늘도 작은 용기를 내어 행복을 찾으러 떠난다. 또 다른 나와의 조우, 또 다른 세상을 만날 생각에 가슴이 뛴다. 나에겐 이 모든 것이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