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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쓴다

by 용간

라시도에게


새 물건을 살 때의 기쁨이 있어. 가지고 싶었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고, 새것이라는 것에서 오는 흥미로움이 있지.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는 다르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는데, 새것을 사면서 그 욕구를 채울 수 있거든.


아빠도 어렸을 땐, 새것에 대한 동경이 있었나 봐. 둘째이다 보니, 형이 쓰던 것을 받을 때가 그랬나? 그냥 새것이 좋았을 때가 있었어.


지금은? 아빠는 다 쓰는 것의 즐거움이 더 크단다.


그 즐거움은 어떤 성취감 같은 것인가 봐. 어렸을 때, 집에 있는 수많은 연필과 펜을 보면서 저건 언제 다 쓸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있었지. 아빠 어렸을 때, 영어 단어 공부를 하는데, 공책에 무수히 반복해서 쓰면서 외웠거든. 아빤 그때, 영어 단어를 외우는 즐거움보다는 펜의 심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희열을 더 많이 느낀 것 같아.


지금도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하는 이유는 물건에 대한 애착과 함께 그것을 다 쓰지 못했다는 잔상이 남아서인 것 같아.


다 쓴다.


우리 모두 언젠가 하나님 앞에 설 날이 올 거야. 그때, 이런 질문이 올 것 같아.


너는 네가 선물 받은 것을 다 쓰고 왔니?


네. 최선을 다해서 쓰고 왔습니다.


돌아갈 때, 싸들고 갈 수 없으니, 선물 받은 재능과 여건을 최대한 잘 쓰고 가자. 아빠가 떠날 때, 남아있는 것들은 해져서 못 쓰는 것들만 있었으면 좋겠어. 그건 재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란다.


이런 생각이 아무 가치 없이 물건이나 재능을 낭비하는 것을 의미하진 않아. 가치를 만들어야 남겨야겠지? 그 가치가 무엇인진 모르겠어. 내가 부여한 가치일 수도 있고, 남들이 나에게 부여한 가치일 수도 있어. 하지만, 가치의 공통분모에는 이로움이 있어야겠지. 그래서 이로움이 없는데 뭔가를 쓰는 것이 즐겁지 않은 것 같아.


너희의 사랑하는 마음도 다 썼으면 좋겠다. 마음 한켠에 남겨놓아 나만 즐기지 말고, 너희와 함께 하는 시간, 함께 하는 공간을 다 썼으면 좋겠어.


거의 반년을 쓴 로션. 그 통을 반으로 잘라서 안에 있는 것까지 모두 긁어 쓰고 버리고 나니 드는 생각이란다.


다 쓰자. 잘 쓰자.


너희 아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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