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의 쌀쌀함이 물씬 다가왔던 10월 말, 작년 그리고 재작년에도 고민만 하다 결국 못 산 플리스를 사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만만하고 따뜻한 플리스.. 올해는 꼭 사리라.. 그렇게 말하며 무신사 어플로 플리스를 탐색했다. 그러다 한 옷에서 마우스 스크롤이 멈췄다. 검은색 바탕에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플리스였다. 할인해서 10만 원 정도 하는, 개성 있고 힙한 디자인이었다. 곧장 리뷰를 살폈다. 사람들이 찍어 올린 사진은 여지없이 내 마음의 불꽃을 활활 타오르게 만들었다. 하지만 좋은 리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털이 많이 빠진다는 리뷰를 남기고 있었다.
"예쁜데 털 빠짐이 있네요. 그냥 입을게요." 하는 식이었다.
개성 있고 힙한 디자인에 털 빠짐이 많은 플리스. 앞 구르기를 하며 봐도 그건 내 소비철학에 어긋나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내 눈은 이미 희미하고도 확실하게 반짝인 지 오래였다. 그걸 입은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질 정도로 내게 어울리는... 안 입어봐도 이미 알았다. 그건 내 옷이었다.
만약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라면 바로 구매했을까? 10만 원 정도면 합리적이네 했을까? 10년은 입을 수 있는 옷을 사야 한다는 신념을 던져버리고, 당장 1년 뒤도 장담할 수 없는 옷을 살까? 아쉽게도 나는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미 작년, 재작년에 플리스를 하나, 아니 두 개쯤은 사고도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고작 10만 원짜리 옷 하나를 두고도 몇 번을 고민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절제력을 발휘하여 자꾸만 구매 버튼으로 향하는 마우스를 간신히 옮겨 무신사 창을 껐다. 그 순간 마우스는, 50g도 안 할 것 같은 그 물건은, 바벨만큼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그다음엔 몸을 일으켜 화장실에 갔다. 그리고는 물을 마셨다. 그러고 있으니 슬슬 아이들이 등교했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한 아이가 와서 인사했다.
"어, 윤진이 오늘 일찍 왔네."
나는 웃으며 답했다.
이어서 파도처럼 밀려드는 아이들과 인사를 하고, 수업을 준비하고, 수업을 했다. 그러는 사이 플리스는 기억 저편으로 사라졌다.
다시 플리스를 떠올린 것은 6교시를 모두 마치고, 아이들이 모두 하교한 후였다. 다행히도 그때 내 정신은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 힙한 플리스는 당장 내년만 돼도 촌스러워 보일 거야. 게다가 털 빠짐도 심하다잖아.'와 같은 합리적인 생각이 이제야 들기 시작했다. 나는 다른 플리스를, 요컨대 더 적합한 플리스를 찾아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확신의 내 옷이었던 것이 이제는 성수동에 사는 언니야들이나 입는 옷이 되어 있었다.
제정신으로 돌아온 나는 훨씬 무난하고 털 빠짐 이슈도 없는, 그로 인해 10년 후에도 끄떡없는 옷을 찾을 것이다. 10만 원 보다 저렴하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오래 입을 수 있다면 기꺼이 살 것이다. 나는 주로 이렇게 소비를 한다. 너무 마음에 들어서 혼자 세워둔 규칙을 어기고 싶어질 때마다 딴짓거리를 한다. 그러면서 잠깐 외출한 이성을 되찾는다. 그리고 다시 생각한다.
나는 이 과정을 마음 신호등이라고 부른다. 신호등에 빨간색, 초록색 불이 있듯이 내 마음에도 2가지 색의 신호등이 있다. 매 번 신호등을 켜보고, 딴짓거리를 한 후에 한 번 더 켜본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으면 몇 번이고 더 신호등을 켠다. 이렇게 하면 내 마음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다. 한 번 초록불이 켜졌더라도 다음번에는 아닐 수 있다. 그러면 옳다구나 하며 안 사면 된다. 하지만 만약 시간을 더 가져봐도 여전히 초록불이라면 그때는 산다.
많은 일들이 으레 그렇듯, 횟수가 늘어나면 정확성도 함께 올라간다. 마음 신호등도 마찬가지다. 같은 물건을 놓고 여러 때, 여러 장소에서, 여러 번 생각해도 계속 초록불이라면 그건 사야만 하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급히 필요하거나 갖고 싶은 물건일 확률이 높다. 굳이 이렇게까지 해야만 하는 이유는 내가 나를 믿지 못하는 것도 있지만, 우리가 상황과 감정, 분위기에 취약하기 때문이다. 가게 직원의 압박, 친구의 것이 좋아 보여서, 단지 내 기분이 그러고 싶어서... 등 내가 눈치채지 못할 여러 가지 이유로 비합리적인 선택을 하고 마는 것이 나이고 또 당신이다.
그렇다면 신호등은 몇 번 정도 켜야 적당할까? 그 횟수는 어떤 물건을 사는지에 따라 달라진다. 그 물건의 시급성, 필요성, 가격을 고려해서 신호등을 켜는 횟수가 달라지는 것이다. 급하고 필요한 물건이라면 비싸더라도 1~2번 정도만 켜고 바로 산다. 하지만 다이슨 에어랩처럼 이미 집에 드라이기가 있어서 그다지 급하지 않고, 딱히 필요하지도 않으며, 심지어 비싸기까지 한 물건은 10번이고 20번이고 더 고민한다. 많은 사람들이 강추한다는 이유로(나도 써보니 알겠다. 여성분들! 강추다 강추!) 20번 연속 초록불이 켜지더라도 21번째 신호등을 확인하기 위해 또 딴짓거리를 한다. (여담이지만 다이슨 에어랩은 결국 샀다. 집에 있던 드라이기가 맛이 가고, 그 고장 난 드라이기를 반납하면 할인을 해주던 이벤트가 겹치던 2년 전 어느 날.)
몇 개월째 5천만 원짜리 테슬라를 두고 신호등을 켜고 있다. 과장 많이 보태 100번 정도 켰을 것이다. 50번의 초록불과 50번의 빨간불을 켰던 내 마음속 신호등은 지금 빨간불 상태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확신의 내 차였던 것이 이제는 판교의 모 대기업에 다니는 젊은 개발자들이나 타는 차가 되어 있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신호등을 켜게 될지 모르겠지만, 몇 번이나 더 딴짓거리를 찾아다녀야 할지 모르겠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소비의 합리성을 높여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