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 생각을 사러 문구점에 가다

주객전도 문구 활용법

by 문지

축축 늘어지게 덥거나 으슬으슬하게 춥던지, 어떤 인간이 힘들게 했던지, 꼭 그런 일이 아니더라도 무너질 일은 일상에 많다. 방에서 눈을 떠도, 잠이 깨도 몸을 일으키기 싫은 완벽한 침잠의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노트를 사야 한다. 집에 새 노트가 있다고 해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무작정 나가는 것이다. 구경하는 것만으로 힘이 나는 예쁜 문구점을 향한다. 그곳엔 노트와 편지지와 연필 등이 고급스러운 것부터 귀여운 것까지 빼곡하게 늘어서 있다. 거의 모든 문구를 다 좋아하고 갖고 싶어하지만 그 중 제일 좋은 건 노트이다. 이름에 ‘지’ 자가 들어가는 게 ‘종이 지’ 자로 오역되기라도 하는지, 예쁜 종이 묶음만 보면 사족을 못 쓴다.

평소에는 예쁜 노트가 있어도 사지 못한다. 과거의 내가 집에 쌓아둔 것들을 먼저 소진해야 한다는 생각에 억지로 참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나는 몹시 지쳤고, 힘이 없어 돈이라도 쓰고 싶다. 마음속에 정해둔 예산 범위 안에서 제일 예쁜 노트를 고른다. 필통을 까먹고 안 들고 왔다면 어쩔 수 없지, 연필 하나도 같이 산다. 색연필도 한 자루 살까? 집에 쌓여 있는 필기류들의 잔소리는 무시한다. 그러고는 좋아하는 카페로 간다.

음악, 조명과 새로운 공기로 가득하다. 갓 나온 음료는 신선한 과일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할 일, 혹은 해야 할 감사를 외면한 조급함은 잠시 잊어두고 천천히 음료를 마신다. 가방에 들어 있는 노트와 펜을 꺼낸다. 새로 산 문구는 갓 나온 음료와 비슷하다.

비닐을 뜯고, 새 종이 냄새를 맡는다. 종이가 들뜨는 걸 싫어하므로 표지인 맨 첫 장을 공들여 쫙 편다. 한 장을 넘기면 새하얀 노트가 백사장처럼 펼쳐진다. 이제 시작이다.

끝내지 못한 플래너, 해야 하는 일, 계획,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는 현실의 무언가는 잠시 넣어두고 지금 이 순간은 노트와 나 둘뿐이다. 적고 싶은 걸 적는다. 혼잣말도 쓰고 뜬금없는 생각도 쓰고 ‘또 문구를 샀다….’같은 말도 적는다. 점을 찍고, 그 옆에 또 점을 찍는다. 얼굴을 만들고 획을 죽죽 그어 머리카락도 그려준다. 기록은 이렇듯 갑자기 시작된다. 서론의 얼굴과 눈을 마주친다. 본론으로 넘어간다. 솔직한 말들이 소심하게 나타나서는 이내 목소리가 커진다. 마치 목이 풀린 것만 같은 후련함이 찾아온다. 음료를 한 모금 마신다. 얼음이 잘그락거린다.

노트의 표지를 한참 감상하고, 만지작거리며 속이 꽉 들어찬 제철 노트의 물성을 느낀다. 하고 싶은 일이 생각난다. 갖고 싶던 걸 샀기 때문이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원하는 일을 적다 보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까 하는 마음이 생긴다. 당분간 방금 시작을 함께한 이 노트 한 권만 단촐하게 들고 다녀야지. 가방은 가벼워야 멀리까지 갈 수 있으니까.

아주 사소한 일부터 계획한다.

집에 가자마자 씻고 로션 바르기 (O)

물 두 컵 마시기 (O)

노트 펼치기 (O)

스티커 붙이기 (O)

스티커만 붙인 게 아니라 그 김에 일기도 쓰고, 이번 주의 일정도 쓴다. 마지막 할 일은 ‘이불 정리하고 일찍 잠에 들기’이다.

다음날 눈을 떠 무심코 물을 마시고 앉는다. 여전히 축 처지는 마음이다. 색연필로 동그라미를 잔뜩 그린다. 어제의 완료 표시와 겹치게. 투명하게 잘그락거리던 얼음을 떠올리며 노트를 한 손에 움켜쥐고 가방에 넣는다. 신발은 노트가 시키는대로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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