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426 토요일 일기
내 주변엔 너무나 완벽한 대상이 있다. 좋은 대학교, 칼졸업과 칼취직, 좋은 직장, 높은 연봉과 좋은 남편, 많은 친구. 이 중 대부분은 나와 상관없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나는 마치 그 사람이 나의 목적지인 것처럼, 완벽한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는 모자란 나를 계속해서 탓했다. 의견이 다르면 내가 무조건 틀렸다고 생각했고 은연중에 스스로를 계속 비교하고 깎아내렸다. 나의 판단력을 불신하고 의존했다.
나는 사람이다. 따라서 완벽할 수 없다. 완벽주의는 나를 타박하고, 뭐든 해내라고 작은 일을 크게 부풀려서 죄책감을 만들었지만 그 내면의 목소리를 다 들었다고 하더라도 나는 완벽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인 건 완벽할 수는 없어도 고유할 수는 있다. 온전히 내가 되는 길만이 삶을 풍요롭게 사는 길이다. 그러니까 내가 문구류를 너무 좋아해서 필요도 없는 펜이나 노트를 자꾸 1000원, 2000원씩 사들여서 필통에 자리가 없어지고, 학교도 휴학과 복학과 전공 바꾸기를 밥 먹듯이 하고, 책을 빨리 읽지 못하는 것 모두. 내가 선택하고 들인 물건들을 너무나 아껴서 남에게 쉽게 빌려주지 못하는 것도, 그 물건을 남이 함부로 다루었을 때 너무 화가 나는 것도 그냥 나다. 아무 잘못될 게 없는 것이다.
내가 늘 걱정하듯이 '이렇게 늦게 졸업해서'로 시작해서 기타 등등 대충 부정적인 내용에 대한 것들이 현실이 될지라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냥 남에게 피해만 안 주고 나 스스로만 책임지면 된다.
결혼과 출산에 대해서도 사실 내 생각이 없었던 것 같다. 좋은 남편과 가정을 이루는 모습이 부러웠다. 내 나이 29, 연애 경험이라고는 1년이 전부, 주변 남사친 없음, 호구 경력직, 집순이, 내향인, 아직도 학교 다니느라 주변인들하고 나이대 안 맞음. 다음 연애를 시작할 수는 있는지 의심이 드는 조건이다. 시간 여유가 없는 것 같고 조급했다. 그런데 정말로 내가 돈을 모아서 결혼을 하고, 시댁이 생기고, 남편과 집에서 사는 일. 무려 아기를 낳아 기르는 일을 하기에 경제적, 정서적으로 준비가 되었나? 반드시 그래야지만 외롭지 않게 살 수 있는 걸까? 정말 나의 현실로 가져오기에 마땅한 일들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자유가 중요한 사람이다. 어떠한 자유 때문에 다른 많은 것을 희생하게 될지라도 그렇다. 그건 예를 들면 학생 신분으로 달에 최소 100만 원은 차이가 나면서도 열악한 환경에서 살 수밖에 없는 자취 같은 것이다. 조금 천천히 돈을 모으고 안 좋은 집에서 좀 머물면 어떠랴, 나는 아무리 좁아도 내 다리 쭉 뻗고, 징그럽게 솔직한 일기장을 아무 데나 던져둘 수 있는 자유. 요상한(?) 제목의 책을 빌려서 숨겨두지 않을 자유가 있으면 그걸로 족하다. 그렇다고 불온서적이나 이상한 책을 빌리는 건 아니다.
동시에 나는 자주 외롭고, 그걸 잘 못 견디는 사람이다. 지금껏 1차원적으로 혼자는 못 살 거니까 배우자는 있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난 연애를 겪어보니 배우자가 있어도 외로울 수 있고 혼자서도 외롭지 않을 수 있겠더라. 내가 누구냐에 따라, 누굴 만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일을 그저 남들이 부러워서, 다들 하니까. 퀘스트 깨듯 다음 단계로 나아가려고 힘을 쏟고.. 무엇을 위해서? 사실은 연애를 위한 연애, 결혼을 위한 결혼을 하려고 했었나, 그런 건 딱 질색이다. 그 무슨 현실적인 조건보다 사랑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가 전남친을 사랑했던 딱 그 크기만큼 나를 좋아하는 누군가가 나타난다면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물론 당연히 졸업해서 돈 잘 벌어서 모으고, 좋은 사람 만나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일이 최선이고 생각보다 잘 진행되며 그게 내가 제일 행복할 수 있는 길일 수도 있지. 하지만 이 동화 같이 흔하고 이상적인 시나리오가 과연 나에게도 맞는지는 정말 오래 고민하고 생각해 볼 일이다. '남들 다 해서'라는 이유가 아니라, 누군가의 말을 듣고 흔들려서도 아니라 온전한 나의 선택과 결정이라면 괜찮다. 하지만 지금의 나로서는 그저 주변에 휩쓸리는 사람 같다.
이런 모든 생각들은 무슨 책이든 읽으면서 정리하는 게 제일 좋다. 그래서 지금의 여유와 조금의 고독이 반갑다. 나는 내가 궁금하다. 속으로 조용히 말을 걸어본다. 완벽하지 않아도 돼. 넌 누구니? 만으로 26년이 넘게 눈치를 보며 살았구나. 그래도 이제라도 찾아왔으니 용서해 주겠다고 답한다.
내 감정에 허락을 맡지 않고, 나의 진로와 계획에 의견을 묻지 않기로 했다. 나와 잘 지낼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뻔한 이유로 굽신거리지 않으려고 한다. 내 가치관대로 판단하고 실행할 것이다.
이 글이 왜 이리 날이 서있을까. 곱지 않게 자꾸만 차가운 어휘를 고르려는 걸 보면 나도 꽤 지쳤다. 누구든 적당한 거리가 필요하다. 제 아무리 잘난 사람이 와도 나는 내 갈 길을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