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부하고도 새삼스러운 아픔
어제 차단당한 걸 알고 모든 게 없어진 프사를 보고 있자니 무언가 뾰족하고 넓적한 쇳덩어리가 가슴 안쪽을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 차가운 이별의 그림자가 서늘하게 나를 덮쳤다.
모든 관계는 상호작용이니만큼 나는 무엇이 문제여서 사랑을 끝내버렸을까 종일 멍하니 생각했다.
너무 많은 것을 이야기했다. 너무 솔직했고 언제까지고 사랑해 줄 듯한 안정감은 그의 나태함을 불렀다. 여자는 적당히 튕길 줄 알아야 한다던데 그게 문제일까? 이건 답을 모르겠다.
또 너무 많은 걸 이야기했다. 헤어지라고 했던 주변의 말들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그 의견들엔 백번 동의하나, 원인이 된 문제들을 스스로 생각해 보고 나 스스로의 말로 정의했어야 했다. 내 짙고 변덕스러운 감정과 분리해서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나의 언어로, 일기라도 썼어야 했다. 특히 경제관념도, 앞으로 돈 벌 의지도 없는 남자와는 빨리 헤어지고 결혼할 사람 찾으라던 엄마의 충고는 당연히 옳은 말이었지만, 난 그 애가 순수학문을 공부하는 길이 맞다고 여겼다. 중간에 취직을 할까 흔들렸던 때 나는 그게 더 슬펐던 걸 보면 그랬다. 그리고 결혼적령기에 가깝긴 하나 아직도 학생이고 모은 돈도 없는 나에겐 먼 일이었다. 진짜 결혼을 하고 시댁이 생긴다, 이걸 현실의 일로 생각도 안 해봐 놓고 섣불리 판단한 게 미련으로 변했던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책의 훌륭한 조언도 나의 생각을 거치지 않고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이 책 저 책 다 훌륭한데 둘이 반대 주장을 펼칠 땐 그럼 어찌한단 말인가.
반복되는 실망감과 언젠가 헤어져야 한다는 생각은 갈등 앞에서 해결과 인내 대신 끝을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끝을 말해버리고 후회한 내가 사실 제일 나쁜 쪽인지도 모른다.
변명하자면 이별해 보고 나서야 끝이 뭔지 알았다. 헤어지고 다시 만나는, 나로서도 이해를 못 했던 이상한 관계를 몇 번 반복하니 끝이 끝 같지가 않았다. 차라리 이렇게 분명하게 끝내준 게 너무 고맙다. 비꼬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더는 이런 이상한 상황을 만들지 않겠다고 결심하게 됐으니까. 끝이라는 게 정말 무엇인지, 상실이 뭔지 살아가며 끊임없이 생각하게 됐으니까.
그래도 더 노력할 수 있었다는 생각은 안 든다. 내 쪽에선 더 노력할 마음도 의지도 있는데 원인이 내 쪽이 아닌 게 더 잔인했다. 차라리 내 문제면 고쳐버리고 말지, 그게 아닌 건 내가 어찌할 수 없더라.
헤어지자는 말을 쉽게 하지 않고, 말의 무게를 아는 사람과 만나고 싶다고 언젠가 생각했던 것 같다. 내가 이런 인간인지 몰랐다. 그러니까 이별을 결심하고 내뱉은 용기까지는 좋았는데, 번복하고 되돌리려는 말도 안 되는 시도가 문제였다. 굳은 결심과, 나의 판단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면 한 번의 헤어짐으로 끝이었겠지. 아니면, 끝을 생각할 시간에 어떻게든, 지독하게 싸워서라도, 무언가 해결을 해내려 했겠지. 우린 침묵이라는 무책임으로, 그저 얼버무리며 한 해를 지냈다. 그렇게 모든 게 흐려진 후에는 서로의 마음을 선명히 볼 수가 없었다. 우린 사랑했지만 방법을 몰랐다. 혹은 알고도 행동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용기도 부족했던 것 같다.
이것저것 생각하다 결국 우린 '인연이 아니'었다는 말로 문장을 끝내버린다.
다음 사랑에선 안 그래야지 다짐하다가, 만약 다음 사랑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아니,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미래에도 쭉 함께 지속해 나갈 사랑이다. 몇 년을 더 만나더라도 우린 결혼할 수 없을 것이었다. 결혼한다 해도 불행할 걸 알았다. 그러니까, 내 걱정이 말하는 대로 다음 사랑이 없고 내가 삶에 주어진 유일한 사랑을 발로 차버린 거라면, 양자택일로 걔 아니면 독신을 선택해야 한다면 독신을 택하는 게 맞다.
어제는 다른 친구와 (나보다 5살 어린 진짜 친구다) 오랜만에 시간을 보냈다. 얘가 여자친구를 사귀면 나는 가는 길 고이 비켜드려야겠지. 마음이 답답해지려다, 어차피 영원한 건 없다는 당연한 말이 너무나 낯설고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아, 지금 현재밖에 없는 게 당연하구나.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을, 미래를 당겨 걱정하며 보냈는지. 나는 네 잎클로버를 들고 다시 환하게 웃으며 풀숲을 걸었다. 낄낄대며, 추측이나 생각 대신 감각에 집중했다. 5월의 편안한 초록색, 햇빛이 구름 커튼을 뚫고 내리쬐고 얄팍한 한 줄짜리 거미줄이 은색으로 빛났다. 날아가는 까치는 기와집을 닮았다. 나무의 옹이구멍은 가지가 꺾이는 아픔을 이겨낼 때 생긴 다지. 나무와 새의 생김새를 신기해하는 이상한 애의 새삼스러운 질문들로, 계속해서 피어나는 쓰라린 마음을 애써 눌러대며 어떤 시간을 견뎌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