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자아의 윤곽은 고통으로 조금씩 선명해지고

뻔한 이별 이야기

by 문지

고통을 통해 자아의 윤곽을 알 수 있다는 말을 들었다. 내가 제일 최근에 겪은 이별의 고통을 생각해 보면 일견 맞는 말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랑을 줄 수 있었고, 무얼 원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으니.


아름다운 이별은 없다.

우리가 예외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이별 후에도 자주 마주치는 이런 특수한 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잘 지낸다고 생각했으나 그게 이렇게나 쉽게 망가질 줄은 몰랐다. 수업 땐 아는 척도 하지 않고 빠져나가면서, 강의자료 보내줄 때만 연락했다. 사실 굳이 받지 않아도 되는 자료였다. 우리 둘 다 헤어짐을 인정하고 받아들였는데도 심지어 밥 약속까지 잡을 뻔했다.


그 애는 주변을 잘 살피지 않는다. 바로 앞에 있어도 못 알아보고, 철저히 주변을 흐리게 처리하고 앞만 보는 느낌이었다. 그게 난 너무 싫었다. 남들을 돌아보는 여유마저 없는 사람처럼 보여서.


어제도 그저 강의실을 빠져나가기에 바빴던 그 애는 나를 못 보는 게 오히려 더 힘들 정도로 가까이 있었고, 내가 있음을 분명 알고 있는데도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앞에 두고도 못 보는 그 눈빛이 낯설어야 하는데 슬프게도 익숙했다. 우리가 만날 때도 항상 내가 먼저 발견하고 먼저 부르고. 넌 항상 내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다. 문을 통과해 갈 때 내가 잠시 뒤쳐지면 한참 후에나 알았었다.


난 너무 조심스러웠다. 이 사랑이 깨질까봐 두려워 도리어 더 힘을 가하고 있다는 걸 헤어지고 나서야 알았다. 내 상식 선에서는 이해가 안되는 행동이 매번 새롭게 생겼고, 엄밀히 ' 고칠 '일도 아닌 데다 어떻게 해달라고 말하기도 애매해서 말로 꺼내기조차 애매했다. 항상 이런 식이었다. ' 모르나 보다.'생각하고 넘어갔던 나를 바보로 만들려고 작정이나 한 듯 너는 사실 다 알고 있었다. 내가 상처받는 걸 알았고, 싫어하는 거 다 알고도 그랬었다. 왜, 귀찮았니?


온갖 사랑을 가득 담은 메시지를 보내며, 나는 답이 몇 시간씩 늦게 오면 걱정되니 조금만 신경 써달라는 말을 해도 별반 달라질 건 없었다.

겨우 몇 천 원 아끼고 싶어서 머리 굴려가며 돈 계산을 했고 사귀는 내내 그놈의 더치페이를 했다. 내가 싫다고 했는데도.

아, 내가 하려는 얘기는 이런 게 아니었는데.

근데 정말 너무했다. 그런 일들을 많이 겪고 그냥저냥 사귀는 선택지도 있었는데 내가 먼저 끝내자고 했다. 언젠가 혼자 예쁜 걸 구경하러 들어갔는데, 내가 사주려는 마음은 잔뜩 들면서 그 애가 사줄 걸 기대하는 마음조차 생기지 않길래 그랬다. 돈이나 결제 문제는 바라지도 않았건만 거기서 그치지 않고 모든 일에 그랬다. 비참했던 그 무수한 일들에 대해 쓰는 건 무의미하니 더 쓰진 않겠다. 이런 식으로 흘러가면 내 윤곽이 남을 헐뜯는 모양새가 되니 그게 제일 억울한 노릇이다.

나의 윤곽은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단 네가 보답하는 사람이라면. 받을 줄 아는 사람이라면.‘이었다.

그리고 모난 부분을 망치로 다듬어내는 공예가처럼, 고갈되는 것도 모르고 마구 퍼주는 것, 그리고 이미 판단을 내렸는데도 뒷걸음질 치고 관계를 재활용하는 부분은 도려내야 한다.


그래, 그럼에도. 너의 그 무수한 단점에도 나는 끝까지 노력했다. 너는 받아먹기만 하는 사랑에, 네 말마따나 행복하기만 했겠지.

그래도 마주 잡은 손의 온기와 함께 있음의 따뜻함과 서로 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경험했으니,

세상을 다 가진듯한 따뜻함과 안정감이 사랑이고, 동시에 서로 바라보는 양방향이 진정한 사랑인 걸, 그게 너와는 불가능하다는 걸 늦기 전에 알아냈으니,

그걸로 되었다. 아니, 솔직해지자면 그거라도 알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원래 내가 써서 건네려던 조심스러운 말들보다는, 다소 거칠더라도 솔직한 내 말로 끝내버리는 게 낫다.

어젯밤에 카톡을 보냈다. 어딜 그렇게 급히 가냐고. 내가 바로 뒤에 있었는데 못 보더라고. 근데 그 모습이 너무 예전과 겹쳐 보여서 마음이 아프더라고.

답을 요구한 건 아니었지만 뻔하게도 너의 답변은 아무 말도 않는 것이었다. 넌 늘 그랬다. 차라리 좀 거칠지라도 싸워서 직면하는 게 낫지, 늘 조용히 피했다. 내게도 잘못이 있다면 화를 안 내고 사소한 걸 과하게 칭찬한 것. 네게 말을 예쁘게한다고 칭찬한 걸 후회한다. 가능하면 취소하고 싶다. 거친 말이 나올 법하면 피해버리니 그랬겠지.

이제 난 더 용감한 사랑을 하려고 한다.


어떤 사랑은 이별을 위해서 한다.

그 이별은 다음 사랑을 위한 뿌리로 몇 배로 튼튼하게 자란다.

덕분에 나를 지키고 아껴주는 방법을 연구하고 실천하게 되었다. 그러니 다음 사랑을 만나지 못하더라도, 나 하나 사랑해주며 살면 그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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