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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

독서일기 『흰』 (한강, 문학동네)

by 서정아

나는 무채색을 좋아하고 그 중에서도 흰색을 가장 선호한다. 옷을 고를 때도 그렇다. 쉽게 더러워지는 걸 알면서도 결국 또 흰 옷을 사고 만다. 흰색은 다른 색들과 위화감 없이 어울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무엇도 함부로 침범할 수 없는 세계인 것 같고, 나는 그 점이 무척 마음에 든다.


그 ‘흰’ 색채로 가득 차 있는 소설 『흰』은 일반적인 소설의 형식, 즉 어떤 서사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가는 방식을 띠고 있지는 않다. 작품의 기본이 되는 모티프는 작가인 화자가 바르샤바에서 지내면서 떠올리는 ‘흰 것’들의 이미지이며, 그 각각의 소재들을 하나의 챕터로 구성한다. 에세이 같기도 하고 시 같기도 한 이 작품은, 좋은 문학작품의 경우 장르 구분이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증거로도 보인다.


이 소설 속에서 화자는 태어나자마자 세상을 떠나고 만, 자신의 언니가 될 뻔했던 한 생명을 떠올리며 여러 생각들을 펼쳐나간다. 그것은 일종의 애도의 과정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이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으나 시간차를 두고 엄마의 자궁을 공유했던 한 존재에 대한 그리움과 추모. 설령 천수를 다 누린 이의 죽음이라 하더라도 죽음이라는 사건은 남은 자에게 슬픔을 불러일으키는데, 너무도 짧게 생을 마감하게 된 이에 대한 안타까움은 더 말할 것도 없겠다.


‘자작나무숲의 침묵 속에서 당신을 볼 것이다. 겨울 해가 드는 창의 정적 속에서 볼 것이다. 비스듬히 천장에 비춰진 광선을 따라 흔들리는, 빛나는 먼지 분말들 속에서 볼 것이다. /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 (135p)


사라진 존재를, 소멸한 존재를 잊지 않는 것. 지금은 내 앞에 없지만 언젠가 살아 숨쉬었던 그의 숨결을 찾아보려 애쓰는 것. 다른 형태로 숨어있는 존재를 끝내 발견하는 것. 한강 작가는 자신의 문학으로 그러한 사랑을 해내고 있는 것 같다.


이처럼 어떤 사랑은, 상실 이후에도 끝나지 않고 또다른 방식으로 계속해서 깊어진다.





책 속에서


부서져본 적 없는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내어 여기까지 걸어왔다. 꿰매지 않은 자리마다 깨끗한 장막을 덧대 가렸다. 결별과 애도는 생략했다. 부서지지 않았다고 믿으면 더 이상 부서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니 몇 가지 일이 그녀에게 남아 있다;

거짓말을 그만둘 것.

(눈을 뜨고) 장막을 걷을 것.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자신의 것을 포함해-초를 밝힐 것. (10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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