멸치육수에 집된장을 풀고 청양고추 조금, 표고버섯 두 개, 시골에서 가져온 방앗잎과 두부를 넣고 된장찌개를 끓였다. 동그란 애호박을 얇게 썰고 밀가루 옷 입혀 계란물로 목욕시키고 달궈진 프라이팬에 노릇이 구워 초고추장을 곁들였다. 식구들을 위한 저녁을 준비하다가 뜬금없이 떠오르는 생각. 내가 만약 불현듯 죽음을 맞이하게 되고 마지막 1분 동안 전 생애를 반추하게 된다면 어떤 일들을 기억 속에서 꺼내볼 수 있을까.
아주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시던 비 오는 날의 수제비, 흠뻑 젖은 채로 대문을 들어섰을 때 구수하고 달짝지근하게 풍기던 술빵냄새, 국민학교 6학년 때 심한 독감에 걸린 나를 업고 밤을 지새우셨던 엄마의 등, 어느 겨울 아빠가 만들어주었던 토끼털 귀마개와 투박한 눈썰매.
어른이 된 후 갔었던 배낭여행, 홀로 헤맸던 지리산 둘레길, 어둠을 질주하며 맞이했던 태백산 야간산행 끝의 찬란했던 주목군락에서의 새벽빛들도 아름다웠지만 어쩌면 아주 작고, 소소하고, 따뜻했던 어느 날의 엄마의 손길과 아빠의 관심이 더 애틋하게 떠오를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날들의 기억을 우리 아이들에게도 남겨줄 수 있을까...
오늘 준비하는 따뜻한 식사가, 바로 구워서 달달해진 애호박 전이 차려졌던 어느 비 오는 날의 저녁이, 우리 아이들에게도 힘들고 지칠 때 구원의 각인이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들엔 낯선 처마밑에서 조금은 먼 타인들과의 만남보다는 익숙하고 포근한 일상의 그늘아래에서 편히 쉴 수 있기를 기도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