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수

by 이혜연



꽃피는 춘삼월

어디서 불어올지 모르는

님 소식을 바람결에

겨우 붙잡았을 때부터 꾸었던

동그랗고 노란 꿈들이


속절없이

후드득후드득

다 영글지도 못한 채

보도블록으로 떨어지면


기다리지 않은 소식들

그리움이 지워진 무심한 발걸음들이

아직 여린 살들을

짓이기고 지나가고


길가에 물든 노란 상흔들이

가을 울음 속에 지워져 간다


밟히고 으깨지며 아팠던 날들은

이 비에 흩어져

다시 오지 않으리


한참 거두어들일 것이 많은 추수기에 이렇게 지루한 비가 내리니 익숙한 걱정들이 발길에 차입니다. 지금은 농가마다 커다란 건조기가 있어서 고추며, 벼들을 모두 그곳에서 말리고 있지만 제가 어렸을 적만 해도 하늘에 해가 걸려야 목숨 같은 작물들도 썩지 않게 잘 거둘 수 있었습니다.


예전 이맘때, 하루 햇살이 얼마나 귀했는지는 몇십 년이 지난 오늘도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이제는 농사를 짓는 부모님도 안 계시고, 먹을 것 걱정 없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가을 한창일 때의 비가 여전히 야속하게 느껴지는 날입니다.


보도 블록엔 노란 은행들이 우수수 떨어져 사람들에게 밟히고 으깨져 가을 길을 노랗게 얼룩지게 만들고 있었습니다. 으깨진 것들 위를 다시 짓밟고 싶지 않아 까치발로 걸으며 새삼 그네들의 지난 계절 꿈꾸었던 꿈들이 보잘것없이 밟혀버리는 것 같아 안타까웠습니다.


지난주에 계획했을 때는 이번 주에 개인전을 하려고 했는데 9월에 이미 10월 오전에 일을 하기로 약속을 한 걸 깜빡하고 있었더군요. 지난주 금요일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갤러리 대관을 취소했습니다. 아마도 전시는 내년으로 미뤄질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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