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을 넘게 살면서 가장 성실한 사람을 뽑으라고 한다면 나에겐 '신랑'이 일등이다. 평생 이렇게 계획적이고 자기 할 일을 미루지 않으며 하루를 꽉 채우며 사는 사람을 본 적이 없다. 결혼 내내 주말엔 언제나 가족과 함께였고 20년이 넘게 다이어리를 꽉 채우며 일정을 조율한다. 그의 다이어리에는 자동차 엔진 오일 교체 시기와 타이어 점검 같은 것도 있고, 세금을 낼 때 갖추어야 할 것들, 생일이나 기념일등이 한 해가 시작되기 전부터 기록되어 있었다. 그래서인지 날짜를 놓친다거나 준비를 소홀하게 한 적도 없다.
반면 나의 패턴은 큰 그림을 그려두고 일정은 시시때때로 변경되기 일쑤였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1년 동안 하고 싶었던 일이나 5주년 계획을 달성 못해본 적은 없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생활비를 충당하던 시절에도 쉬고 싶으면 어떻게든 쉬었고(사실 잠깐의 휴식을 위해 허리띠 꽉 조여 매던 시기가 훨씬 길고 많았지만), 여행이 가고 싶으면 계획된 금액에서 반드시 실행해 냈다. 하지만 신랑은 그 쉬는 시간을 지금껏 단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다.
평범하다는 것은 현대판 노예라는 뜻이다
-부의 추월차선
성실해서 좋은 점은 엄청 많다. 사람이 믿음직스럽기도 하고, 책임감이 강하다는 것도 살면서 큰 강점으로 느껴졌고, 언제나 감사할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그것이 아무리 좋은 습성이라 해도 양면성을 띄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때로 성실한 것이 족쇄가 되기도 했었다. 한시도 쉰 적이 없는 신랑은 잠시 쉬라고 해도 쉬지를 못한다. 항상 할 일이 있었고, 채워놓아야 할 뭔가가 끊임없이 생겼으며, 그럴수록 매번 휴식도 없이 바쁘게 보내야 했다. 여기서 양심고백을 하자면 게으른 부인의 무신경함이 그를 더 쉴 수 없게 만든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신랑은 마르고 천하태평인 나는 날로 날로 돼룩 돼룩 땅 넓은지 모르고 살이 쪘었나 보다. 어떤 때는 성실의 노예가 된 것처럼 보이는 신랑은 그래서 여유로운 마음보다 뭔가 채워야 할 것들에 억눌러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평범한 일상을 들춰볼 수 있는 책갈피가 필요한 때가 온다.
내 생각에 자연의 일부인 사람은 살아가는 주기도 계절과 닮아있어 겨울이 지나야 봄이 온다는 것을 때때로 상기하며 살 필요도 있는듯하다. 쉼 없이 돌아가는 일상이 뒤처지지 않고 잘 살아내고 있다는 믿음을 줄 수도 있지만, 겨울의 추위가 없다면 봄의 아름다운 꽃들도 볼 수 없을 것이다. 글도 행간의 여백이 있어야 깊이가 있고 사람의 삶도 올라갈 때가 있다면 내려와 잠시 숨을 고를 때도 있을 것이다. 지금은 늦은 것 같아도 돌아보면 다 제 때에, 그 시기에 맞게 운명의 바퀴는 운행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살면서 많이 느끼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생을, 스스로에 대한 가치를 너무 작게 느끼지 않길 바라는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