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희언니께 (여덟 번째 편지)
시부모님께서 다녀가신 후 저는 이제 당당하게 주인공으로서 몇 개 안 남은 이벤트를 진행해 봐야겠다는 결심이 들었어요. 급기야 제가 도저히 남편과 함께 지내지 못하겠다 하는 순간이 오고야 말았거든요.
“여보, 나 당분간만 나가서 지낼게. 집 근처로 원룸 구했어.”
“왜 그래?”
“그냥 딱히 뭐라고 이야기하기 어려운 데 마음이 너무 힘드네. 나는 정말 미움도 원망도 없이 그냥 마음 편하게 평온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게 잘 안 돼. 당신이랑 같이 지낼 수가 없어. 당신과 함께 지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어. 마음속에 크고 뜨거운 돌멩이가 덜그럭거리며 돌아다니고 있는 것 같아.”
“꼭 그래야 되겠어?”
남편 눈이 조금 젖어 있었어요.
“응, 미안해. 애들 불러서 내가 이야기할게.”
캐리어에 짐을 싸면서 아이들을 불러서 이 상황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을 했어요.
“엄마 나가서 조금만 쉬고 올게. 며칠 안 걸릴 거야. 힘내서 잘 지내렴. 할 수 있겠지?”
“엄마가 나가면 우리는 어떻게 해요?”
큰아이가 우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웠어요.
“며칠만 기다려줘. 참, 엄마 나가면 어쩌면 할머니께서 오실 수도 있겠지.”
남편을 살짝 쳐다봤어요. 남편은 혼자서는 뭘 잘 못한대요. 언젠가 제 상상에서처럼 저만 오려지는 거예요. 아름다운 가족사진에서 저만 오려져서 사라지는 거죠. 그래도 사진은 여전히 자연스럽겠죠. 비록 그렇더라도 저는 뭔가에 단단히 멱살을 잡힌 듯한 이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점차 흐릿해지다가 결국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네? 할머니요?”
“뭐? 할머니가 오셔서 같이 산다고?”
“우리 집에서 주무신대? 몇 밤? 그게 아니라 뭐 같이 사신다고?”
두 아이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커졌어요.
“왜 그래? 너희 할머니 좋아하잖아?”
“우리가 할머니를 진짜 좋아하는 건 맞는데요, 그거랑 이거는 다르죠. 저번에 학교에서 축구할 때 할머니가 따라 나오셔서 같이 경기하는 친구들한테 너희만 하지 말고 그 공 좀 정호한테도 줘라. 얘도 좀 해보게. 엄청 큰 목소리로 막 이러셔서 어디 숨고 싶었단 말이야. 할머니는 짜증도 엄청 내시고... 아, 몰라!”
“아앙, 나 할머니 무서운데. 그리고 형만 이뻐하잖아. 근데 짜증은 엄마도 많이 내지. 그치?”
두 아이의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어째 내가 집을 나가겠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슬픔 뭐 그런 알맹이가 빠진 듯한 대화가 조금씩 섭섭해질 무렵, 설마 하면서 돌아본 남편까지 미간을 찌푸리고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것이 좀 수상하더라고요. 혹시 두 팔을 벌려 자신의 퇴근을 반기시고, 애정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자신을 지켜보시는 어머니와의 다소 부담스러운 저녁 시간과 날마다 퇴근하고 와서 아이들의 울음 섞인 불평을 들어야 하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던 걸까요? 이런 상황에서도 압도적인 위용을 자랑하시는 어머니의 존재감 앞에 저는 흔적도 없이 풀어지고 있었어요. 그럴 수는 없었어요. 그건 안 돼요. 별거와 이혼에서조차 이렇게 조연으로 떠밀리듯 흘러갈 수는 없었어요.
‘야, 이것들아,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이러지 마! 이것마저 빼앗길 수는 없어. 그래, 나를 봐. 눈앞의 나를 보라고! 다른 생각 말고, 나의 부재를 슬퍼하란 말이다! 나도 한 번이라도 해보자. 그놈의 주인공!’
저는 성난 맹수처럼 포효하고 싶었어요. (노파심에서 말씀드리면 이 편지에 묻은 물기는 눈물이 아니에요, 어디선가 날아온 거칠고 긴 털이 입에 들어가서 그걸 빼내고 쓰다가 종이에 침이 묻은 거예요.) 하지만 앞에서 아무리 잠깐만 내 이야기 좀 들어보라고 해도, 이미 각자의 걱정에 휩싸여 있는 그들에게, 이제 독립을 선언하고 비장하면서도 쓸쓸하게 집을 떠나려고 하는 나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것 같았어요.
“내가 나갈게! 당신이 아이들이랑 이 집에서 지내도 돼! 다들 그만 울어!”
갑자기 남편이 큰 목소리로 이렇게 선언했어요. 그렇지만 그 말에는 어딘가 ‘내가 나가면 안 될까?’처럼 들리는 묘한 구석이 있었어요.
“아니야, 가지 마! 그러지 마. 엉엉, 아빠가 너무 불쌍해. 아빠 가지 마세요. 나는 아빠랑도 살고 싶어. 엄마! 아빠한테 나가라고 하지 마!”
남편까지 내 자리를 넘봤어요.
“저기... 부탁인데 모두들 잠깐 나 좀 봐줄래? 나도 한 번만 제발 좀, 그놈의 주인공!”
큰아이가 목놓아 울었어요. 덩달아 작은애도 울었어요. 치과 치료를 받아서 새까맣게 변한 치아가 보이는 줄도 모르고, 있는 대로 입을 벌리고 얼굴을 찡그려 붙인 채 우는 시늉을 하는 굉장히 못생겨 보이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니 갑자기 나도 울고 싶어 졌어요.
두 아이의 울음소리가 아파트 우리 라인을 넘어 멀리멀리 울려 퍼지고 그만 좀 조용히 하라는 남편의 고함까지 합세하여 머리가 어질어질해질 무렵, 누군가 친절하고 책임감 강한 이웃이 우리 집 현관문을 두드리며 “이봐요, 괜찮아요? 경찰 불러 줄까요?”하는 바람에 혹시라도 잘못해서 경찰서에 불려 가 아동학대 전과가 생겨서 소중한 저의 직장을 잃는 일이 생길까 봐 (아직 대출금도 못 갚았는데) 저는 어쩔 수 없이 우리 남편과 당분간 더 살아보기로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게 됐어요.
그리고 저는 결혼생활의 마지막 이벤트에서는 꼭 주인공 역할을 하고 싶거든요. 이번에는 실패했지만 우리 집 지붕 위에 드리워진 어떤 시커먼 먹구름이 완전히 가셔서 이혼이든 별거든 졸혼이든 결혼생활의 종지부를 찍게 될 그것을 온전히 나만의 것으로 가질 수 있게 될 때까지 저는 어쩔 수 없이 이 남자랑 계속 살 수밖에 없게 된 거예요. 근데요, 말 나온 김에 앞으로 있을지 모를 결혼생활 이벤트에 ‘happily ever after’도 포함시킬까요? 혹시 모르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어차피 돈 드는 것도 아닌데 뭐 어때요?
2019. 4.19. 윤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