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나의 시댁 탈출기
수희 언니께 (일곱 번째 편지)
제가 편지에 썼던 상품평을 읽고 세라믹 칼을 사셨다니 정말 기뻐요. 네, 그 칼 좋아요. 사신 걸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어제는 월차를 내고 시내에 나가 영화를 보고 왔어요. 친구를 만나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왔더니 일찍 퇴근한 남편이 소파에 멍하니 앉아 있더라고요. 남편이 저에게 물었어요.
“당신 나갔다가 지금 들어온 거야?”
“응, 상희 언니 만나서 영화 보고 밥 먹고 왔어.”
“언제 나갔어?”
“11시 영화였어. 왜?”
“낮에 어머니, 아버지 다녀가셨대. 아무도 없어서 문만 두드리다가 집으로 돌아가신 모양이야.”
“그래? 집에 아무도 없었는데 헛걸음만 하셔서 어떡해? 연락받았으면 당신이 반차 내고 오지 그랬어?”
“당신 보러 오신 거 알잖아. 언제까지 이렇게 지낼 생각이야? 벌써 몇 달째야? 이제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옷을 갈아입은 뒤 씻고 거실에 나와서 핸드폰을 보니 같은 라인에 사는 언니에게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어요. 제가 월차를 내고 집에 있는 줄 알고 시부모님이 문을 두드리면서 나와 보라고 대화로 풀자고 저를 설득하려고 하셨대요. 며느리가 일부러 대답을 안 하고 당신들을 무시하고 있다고 생각하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문을 두들기시고 이럴 거면 당장 이혼하라고 소리치면서 화를 내셨던 거겠지요. 결국 다른 입주민의 민원을 받고 관리사무실에서 올라오셔서 시부모님을 설득하여 귀가하시게 했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집에 있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잠깐 고민해 보았어요.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일이 저는 두렵거나 불안하게 만들지는 못한다는 점입니다.
언니, 제 결혼생활에는 빈틈이 좀 있어요. 하이라이트 부분이 듬성듬성 빠졌달까요? 결혼식 이후부터 시댁 식구들과 참 자주도 모였던 신혼생활, 아름다운 이야기만 듣고 배려받으며 마음 편했어야 할 임신 기간에 어머니께 살림을 배우면서 혼자 눈물을 훔치던 시간들, 출산 후 멀리 떨어져 눈물로 그리워하던 아이를 받아 안던 감격의 순간 (언니도 아시겠지만 정호는 조산아라 신생아집중치료실에 있다가 퇴원했어요. 간호사 선생님이 고생 많으셨다고 웃으시면서 아기를 건네주시는데 어머니께서 얼른 뛰어오셔서 저를 밀치고 받으셔서 다들 깜짝 놀랐었죠.) 황후처럼 대접을 받아야 한다던 산후조리 기간을 눈물로 보냈던 일, 첫아이를 키우는 기쁨, (휴직하고 싶었는데 굳이 복직을 하라고 닦달하시더니 정호를 세 살까지 키워주셨어요. 남편과 삼촌을 키우실 때는 너무 가난했고 해 주신 게 없으셔서 정호만큼은 귀하게 키워보고 싶으셨대요.) 이사, 구매할 집을 고르는 일, (매번 알고 싶어 하시고 계약서도 같이 쓰시는 거 아실 거예요.) 집 안의 안주인으로서 내가 의당 가졌어야 할 경험들, 축하, 찬사, 보살핌의 이런 순간을 빼앗긴 채 살아왔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요. 아직은 풋풋해서 아름다웠던, 젊은 내가 온전히 가졌어야 할 영광과 환희의 찬란한 순간들, 심지어 시행착오까지도. 빼앗겼든 지레 포기했든 저는 그것을 어머니께 내어드리고 온전히 누려보지를 못한 거죠. 그렇다고 해도 그건 성인으로서 제가 선택한 일들이니 어머니를 원망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번은 주인공이 되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해왔어요. 나의 결혼생활에서 앞으로 열릴 이벤트의 주인공! 근데 이제 뭐가 남았을까요? 좀 다른 이야기지만요, 이런 생각을 하면 뜬금없이 친정 언니한테 전화를 해서 “혹시 나 시댁에 돈 받고 팔았어? 그런 거야?”라고 묻고 싶을 때도 있었어요. 그러면 “그게 무슨 흉측한 소리냐? 낮술 했냐? 술 먹었으며 잠이나 자.”라고 전화를 끊고 오히려 언니 자신이 맥주를 한 캔 뜯으면서 ‘어휴, 미친년.’하고 한숨을 쉬겠죠.
아까는 언니께 편지를 쓰고 있는데 퇴근한 남편이 곧장 제 방문을 열고 들어왔어요.
“너는 남편이 왔는데 인사도 안 하니?”
“나 바빠. 왜?”
“물어볼 게 있어.”
“뭔데?”
“아직도 날 사랑하니?”
남편이 새로운 공격 방법을 개발한 것 같았어요. 참신하다고 혼잣속으로 감탄하면서 이번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저도 전략과 전술을 다시 짜야하나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다가 남편에게 물어봤어요.
“솔직하게 말해?”
“응, 그렇지만 빗대어 말하지는 말고.”
“있는 그대로 담백하게 말하라는 의미로군.”
“응.”
“안 사랑해.”
남편은 컴컴한 얼굴로 천천히 돌아섰어요.
“문 좀 닫고 나가줘. 그리고 혹시 이혼하고 싶어서 그러는 거면 미리 말해 줘. 내가 생각해 봤는데 정호, 민호는 한 사람이 둘 다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애들은 죄가 없잖아. 그리고 재산분할도 말이야. 내가 변호사 사무실에 전화해서 알아본 게 있는데 궁금하면 여기 앉아 봐. 내 얘기 듣고 있어?”
남편은 황급히 문을 닫고 나갔어요.
‘쳇, 실없는 자식! 뭐? 자기를 사랑하냐고?’
다시 편지를 쓰려고 연필을 잡았다가 옆에 바짝 붙어 앉은 털북숭이를 밀어냈어요.
'더워. 더우니까 저리 좀 가라.'
저는 아까부터 간질간질했던 눈가에 붙은 붉은 털을 떼어냈어요.
2019. 4.17 윤정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