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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 Oct 22. 2023

[소설] 나의 시댁 탈출기

수희 언니께 (아홉 번째 편지)

 어제 시아버지께서 제 통장으로 300만 원을 부치셨어요. 문자 메시지로 “에미야, 네 마음 알았다. 그만하면 됐다. 그만하고 이 돈으로 맛있는 거 사 먹고 주말에 온나.”라고 보내셨더라고요. 이런 상상을 해봤어요. 시부모님께 남편이 당분간 찾아뵙지 않겠다고 진지하게 말씀드렸다면 어땠을까? 푼돈을 쥐어 주시면서 삐친 거 풀고 그만 시댁에 오라고 말씀하실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훨씬 심각하게 받아들이셨을 테지요. 우리는 나이 차이도 거의 없고 직장 생활도 함께 하는데, 왜 이렇게 저는 쉽게 생각하시는 걸까? 답답하더군요. 그래서 아버님께 이렇게 답장을 보냈습니다. 


“아버님, 당분간 찾아뵙지 않겠다는 말씀을 드린 것은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용돈은 감사하지만 다시 돌려드리겠습니다. 제 마음이 어떤 식으로든 정리가 되면 연락드리겠습니다.”     

 

 인터넷 뱅킹으로 돈을 돌려드리고 한 시간이 지나서 다시 살펴보니 아버님께서 상당히 역정을 내시는 듯한 문자와 함께 돈을 다시 보내셨더군요. 어쩔 수 없이 저도 다시 돈을 돌려드리고, 은행에 찾아가 돈을 입금할 수 없도록 그 계좌를 막았습니다. 제가 지금 치졸하게 복수를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하실 것 같은데요,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그저 저는 시부모님의 간섭 없이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뿐입니다. 시어머니께서 “우리 엄마”가 아니란 걸 알아차린 이상 지금처럼 어머니 입장을 배려하고 그분을 이해하려고 최선을 다하면서 지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언니가 제 이야기 들어주기 힘들어하시는 거 알아요. 그래도 제가 속상했던 이야기 좀 들어주고 가세요. 저는 원래도 친구가 많은 사람은 아니었지만, 멀리 이사를 와서 고향 친구들과는 다 헤어지게 되었고 이렇게 어른이 돼서는 친구 사귀기가 쉽지 않아서 많이 외로워요. 솔직히 동네에서 아이 친구 엄마들이 대화 나누는 모습을 보면 허물없어 보이는 그들의 관계가 부러울 적도 많았어요.

“여보, 나도 친구 사귀고 싶어.”

“있잖아, 친구. 연이 씨도 있고, 탁구 동호회 모임도 있고, 원재 엄마... 뭐 많네?”

“으응, 다들 멀리 있잖아. 친구가 가까이 살아서 같이 커피도 마시고, 운동도 하고… 음, 무슨 얘기할 때, 정말 가까운 사이에서, 진짜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막 배를 잡고 웃으면서 주먹을 쥐고 어깨를 다정하게 살짝 밀면서 ‘어우, 미친년’ 이렇게 얘기하는 게 있거든. 그런 거… 음, 그런 관계가 정말 그리워.”     

  장황하게 설명해도 알아듣는 것 같지가 않았어요. 언니는 아시죠? 친한 친구랑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 상황인데요, 맨날 엉뚱한 소리만 하는 그 친구 이야기를 듣고 갑자기! 웃음이 터져서 내 얼굴이 예쁜지 흉측해 보이는지 뭐 이런 거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온 얼굴을 괴물처럼 일그러뜨리면서 깔깔거리고, 종국에는 얼굴 전체가 붉게 변했다가 콧물이 팍 나오기도 하고 기침도 콜록콜록하고 막 그렇게 정신없이 웃은 뒤에 나오는 말, 다정하고 친밀한 우리 사이를 단박에 알 수 있게 해주는 비밀스러운 말 

‘어우, 미친년’


“흠, 뭔지 알 것 같아. 그럼, 그거 내가 해줄게. 어때? 너한테 미친년이라고 말하면 되는 거잖아? 그게 뭐 어려워? 지금 해줄까?”

  우리 남편이 확실히 다정한 면은 있지요. 스위트 가이랄까? 그런데 기분이 묘해지면서 미간을 찌푸린 채 눈을 가늘게 뜨고 한참이나 남편의 얼굴을 바라보게 되더라고요. ‘이게 아닌가?’ 싶은 남편이 재빠르게 자리를 떴어요. 남편이 방에 들어간 뒤에도 그쪽을 향해 한참이나 눈을 흘겼지만 어쩐지 분이 쉬이 가시지가 않았어요.     


  ‘저’를 향한 언니의 따뜻한 마음, 저도 잘 압니다. 그럼요, 네, 잘 알지요. 그렇지만 답장에 저를 향해 ‘미친년’이라고 쓰지는 말아 주세요. 이게 뉘앙스가 묘해서, 말하는 이가 의도했던 표현의 효과가 항상 그대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거든요. 근데 쓰지 말라지만 뭐 딱히 틀린 말도 아니지 않냐? 뭐 이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좀 당황스럽고요.  

    

 어젯밤에는 꿈에 말썽쟁이 털북숭이가 나왔어요. 언니께 편지를 다 쓰고 봉투에 풀칠을 해서 봉했더니 어느 틈엔가 옆에 서 있던 그 녀석이 나는 아직 할 말이 많다고 난동을 부리더니 베란다에서 포효를 하고 심지어는 저를 깨물려고 했어요. 허겁지겁 도망을 나왔다가 좀 진정이 됐나 문틈으로 살짝 들여다보니 털북숭이는 ‘결혼은 미친 짓이야!’로 시작하는 ‘화려한 싱글’ 노래에 맞춰서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어요. 왜 저러는 걸까? 방 안에 털 다 날리는구먼! 살짝 문을 닫고 나오면서 잠에서 깼는데 저는 그때 결심한 것이 있어요.      


 이건 논픽션이지만 제가 소설 잘 쓴다는 언니의 격려에 힘입어 이 경험을 토대로 글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거예요. 언니랑 이야기를 나누면서 제 자신에게 훈장처럼 작은 비밀 하나 쥐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용기가 생겼어요. 남편에게도 시댁 이야기를 소재로 글을 써보려고 한다고 말했어요. 최근에 제 얼굴이 심각했던 이유가 혹시 사채를 빌려 써서 그런 게 아닐까 의심하다가 안심이라도 한 건지, 갑자기 얼굴이 편안해지면서 “언제는 뭘 물어보고 했냐? 네가 하겠다면 하는 거겠지. 뭘 어떻게 하든 네 마음이지만 혹시라도 금전적인 이익이 생기면 그건 5:5로 나눠야 한다.”는 어이없는 말을 하고 얼른 자기 방에 숨더라고요. 


                                                                                                                2019. 4.21 윤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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