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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로 Oct 22. 2023

[소설] 나의 시댁 탈출기

수희 언니께 (다섯 번째 편지)

  어제 시부모님께서 남편 핸드폰으로 전화를 하셔서 한참이나 고함을 치셨습니다. 옆에서 TV를 보는데 방해가 돼서 다른 방에 가서 받아줄 수 없겠느냐고 물었더니 남편이 사나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습니다.

“걔가 원하는 게 뭐야? 말을 해야 알지. 그대로 해준다니까? 버르장머리 없이 감히 어른 전화를 안 받아? 이제 곧 친척 모임이 있는데 거기에는 어떻게 할 생각이야?”

제가 엿듣지 않아도 대화 내용이 전화기 바깥으로 또렷하게 흘러나왔습니다. 제가 원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분명히 지난 시간 동안 마음의 상처를 많이 받았고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니 한동안 저를 가만히 두시길 바란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지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저 당신들의 말을 듣지 않는 며느리, 며느리가 통제를 벗어난 지금의 상황을 참을 수가 없으신 것이겠지요. 제가 원하는 것은 시댁 어르신들의 간섭 없이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거예요. 그냥 그뿐입니다.     


 물론 사이에 우여곡절도 많았어요. 남편이랑 시어머니 연배 되시는 할머니들 출연하시는 아침 방송을 보는데 요즘 며느리들의 불량한 태도에 대해 성토하는 내용이 나오더라고요, “지가 사람이면 도리를 해야지.” 뭐 이런 식으로요. 남편을 가만히 보니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을 안간힘을 쓰며 참는 것 같았어요. 저는 그때 자책감에 슬퍼져서 남편에게 힘없이 물었어요.

“결혼한 여자가 시부모님께 며느리로서 도리를 안 하면 정말 금수와 다를 바 없는 걸까?”

남편이 어물어물하며 ‘이제 네가 정신을 차렸구나.’하는 표정으로 내 얼굴을 바라봤어요.

“아니야, 그렇지 않아. 그동안 너 고생 많았어. 누가 너를 비난할 수 있겠어?”

계속된 가정불화로 저희 남편도 좀 분열되어 있어요.

“여보, 난 계속 사람이고 싶지만 꼭 금수가 되어야 한다면… 이왕이면 맹수가 되고 싶어.”

신랑 얼굴이 좀 어두워지더군요. 갑자기 학창 시절에 배웠던 것이 떠올라 제가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라고 김춘수의 시를 나직이 읊조리자 남편이 불에 덴 듯이 벌떡 일어난 황급히 자리를 떴어요.     

 음, 그렇지, 너무나도 억울한 일도 있었어요. 여태 거칠 것 없이 살아오신 저희 어머님께서 혹시라도 저 혼자 있을 때 우리 집에 오셔서 제 머리채라도 낚아채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잠을 이루지 못하는 날들이 생겨났어요. 어느 날, 저는 남편에게 이런 걱정에 대해 이야기했어요. 혹시 어머니께서 “택배 왔습니다.” 하고 초인종을 누르셔서 문을 열었더니 갑자기 고양이 낙법으로 뛰어 들어오시고, 화장실에 숨어서 경찰을 부를 틈도 없이 저의 머리채를 잡으시면요. 그러면 어떻게 해요? 전 정말 두려웠거든요.

“여보, 혹시 어머니께서 갑자기 방문하셔서 호령을 하시면서 내 머리채라도 휘어잡으시면 어쩌지? 난 너무 걱정이 돼. 그런 일 없게 도와줄 수 있어?”라고 남편에게 근심 어린 얼굴로 물어봤어요.


 그런데 다른 이야기지만 제가 요새 격투기를 배우고 있거든요. 제가 레프트 훅, 라이트 훅을 잘 못 날려서 무의식적으로 그 동작을 자꾸 연습하는데 오빠에게 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기술을 연습하고 있었나 봐요. 특히 저는 팔꿈치로 상대편의 얼굴을 가격하는 엘보우 동작이 어색해서 그것도 자주 반복하는 습관이 있어요. 남편 얼굴이 창백해지더군요. 전 맹세코 그런 뜻이 아니었어요. 전 정말 가슴에 손을 얹고 진짜 진짜 억울해요. 제가 아무려면, 아무리 제가 험한 꼴을 당해도 연로하신 어머님께 감히, 지금 남편이 무슨 상상을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하니 너무나 불쾌했어요. (근데요, 음... 무슨 일이 있어도 어머니께서는 전혀 안 다치실 건데요, 그래도 적어도 제 머리채는 놓으시게 될 거예요. 저는 그래도 꽤 괜찮은 파이터예요.)    

   

  자기 방으로 가서 조용히 문을 닫는 남편에게 문 밖에서 아무리 오해라고 해도 남편은 믿지 않는 것 같았어요. 절대로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어쩌면 남편은 어머님께서 제 손이 느리다고 짜증을 내시며 등짝을 때리시거나 부엌에서 큰소리로 면박을 주셨을 때 제가 짓던 무안한 웃음과 양쪽 귀까지 빨개졌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그러지 않으셨어야 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잠깐 외출해서 돌아왔던 남편이, 어머님과 단둘이 있다가 눈이 빨개진 나를 보고 “무슨 일 있었어요?” 하고 물었을 때 “몰라, 쟤는 무슨 말만 하면 운다.”라고 말씀하셨던 그 순간을, 혹은 빨리 나오라고 얼른 나가자고 짜증을 섞어 재촉하시면서 외출 준비를 서두르시는 어머니를 보고 “네, 지금 가요.” 하면서 넘어질 듯 위태롭게 뛰어나가던 나의 모습도 떠올리고 있을까요?

“아니야, 그런 일 없어. 우리 집에 절대 안 오셔. 절대 절대 안 오셔. 내가 미안하다. 내가 정말 미안하다.”


 저는 문 밖에서 부드럽게 남편을 부르며 문을 두드렸는데 흥, 글쎄 우리 남편은 내게 당장 저리 꺼지라는 듯이 내다보지도 않고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지 않겠어요? 우리 남편은 저렇게 잘 삐친다니까요. (쳇, 자기도 그런 주제에 시댁에 다녀와서 울먹이던 저에게 “이렇게 성격이 예민해서 사회생활은 어떻게 하냐?”라고 걱정하면서, 다정스레 웃으며 커피를 타주던 남편의 얼굴이 떠오르네요.) 방금 전까지 소파에 앉아 하하호호 하다가 갑자기 왜 저러는지 알 수가 없어요. 그래도 정말 다행이지 뭐예요? 어머니께서 우리 집에 앞으로 안 오신다니 조금 마음이 놓였어요. 전 그런 장면을 상상만 해도 정말 정말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던 참이었거든요.     


                                                                                                               2019. 4.13. 윤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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