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로 Oct 22. 2023

[소설] 나의 시댁 탈출기

수희 언니께 (여섯 번째 편지)


 언니께 편지를 쓰려고 앉아 있는데 남편이 “시원한 맥주 한 캔 갖다 줄까?”하고 물어보네요. 맥주를 마시면서 쓰면 참 시원하고, 편지도 더 잘 써질 것 같기는 한데 그걸 마시면서 이런 글을 써도 괜찮은 걸까? 고민하게 되는군요. 제가 피도 눈물도 없는 카리스마의 결정체이거나 독한 년이라면 좋았겠지만, 사실 저는 허술한 사람이라 직장에서 ‘죄송합니다. 감사합니다.’ 하면서 사과와 감사 인사를 하고 다니느라 정신이 없고, 혹시 그걸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이 있다면 저렇게 사방에 인사를 하면서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다 보면 속도가 점점 빨라져 어디 먼 곳으로 튕겨나가는 것은 아닐까 지켜보는 이를 걱정하게 만드는 그런 소심한 사람이거든요.

 “엄마가 수희 누나까지 갑자기 끼어들게 만들어서 걱정이 많았는데 요새는 기분이 좋아 보이네.”

이렇게 말하면서 남편은 미소 지었어요. 이 사람의 희고 가지런한 치아를 보니까 정말 마음이 복잡해지네요. 다들 저처럼 미움과 연민, 죄책감과 자책감, 동료애. 원망. 원한, 사랑, 후회 심지어는 그리움의 어디쯤인가를 서성거리고 있는 거겠죠?


  차라리 저 새끼가 조금만 더 나쁜 놈이었으면 내 인생이 훨씬 심플했을 텐데


 어머, 이건 제가 쓴 게 아니에요. 갑자기 연필이 작아지고, 손등에 털이 북슬북슬해지는가 싶더니 저절로 이런 문장이 적혀 있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지우지 말고 그냥 둘까요? 어떤 문장을 굳이 지우고 그러는 것은 사실 매우 번거로운 일이죠. 뭐 가만 보니 그렇게까지 틀린 말도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뭐.     


 언니 말씀이 맞아요. 제가 처음부터 어머님과 불화했던 것은 아니에요. 태초에 친척들, 지인들에게 대외적으로 참한 며느리를 과시하고 싶어 하셨던 어머니가 계셨고, 그 기대에 어떻게든 부응하고 싶어 했던 가련한 며느리가 있었지요. 그런데 그 두 사람은 차갑고 날카로운 세상에게 패배하게 돼요. 정말 비극적인 이야기지요. 그날은 가까운 친척 어르신 손주 아기 돌잔치 날이었어요. 어르신들께서 식사를 마치시고 돌잔치를 했던 아가네 집에 모이셨어요. 저도 물론 그 자리에 함께 갔지요. 저는 어머니의 비서이자, 분신이자, 딸이잖아요. 어머니께서 마침 일본 여행을 다녀오신 자랑을 자연스럽게 꺼내시기 위해 그곳에서 사 오신 세라믹 칼을 꺼내놓으셨어요. 그 모습이 귀여우셔서 저는 혼자 속으로 조금 웃었어요. 칼날의 색은 하얀색이었고 어머님 말씀으로는, 뭐라고 하셨더라? 쇠붙이도 자를 수 있다고 하셨지만, 겉모습은 마치 플라스틱처럼 만만해 보이는 그런 과도였어요.      


 그건 그렇고, 차를 내오랴 과일 준비를 하랴 아기 엄마가 혼자 엄청 분주하더라고요.

“제가 부엌에 얼른 가서 좀 도울게요.”

“괜찮다. 앉아 있거라!”

어머니께서 과일은 그냥 가져오면 우리가 까서 준비를 하시겠다고 아기 엄마를 배려해 주셨어요. 바구니에 사과랑 뭐 이것저것 내왔던 것 같아요. 어머니께서 자랑스럽게 건네시는 세라믹 칼로 제가 예쁘게 과일을 깎기 시작했죠. 아닌 듯 하지만 은근히 다들 지켜보시는 것 같기도 하고 긴장되기도 하고 분위기가 묘하더라고요. 그리고 제가 한눈을 판 것도 아니었는데, 아차차 하는 순간 과도가 미끄러지면서 손을 깊숙이 베고 말았어요. 얼른 옆에 티슈를 뽑아 피를 흘러나오지 않게 막았어요. 다행히 다른 분들은 눈치채지 못하신 것 같았어요. 양손을 맞잡고 어르신들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맞장구도 치면서, 저는 손가락을 잃게 되는 한이 있어도 모임이 파할 때까지 절대 다친 손을 꺼내놓지 않겠다고 결심했어요. 그런데 우리 남편이, 다정도 병인 우리 남편이 그 장면을 본 것 같았어요.

“너 왜 그래? 손 다쳤어?”

“아니야. 자기, 괜찮아.”

“아닌데 다쳤는데……. 어디 좀 봐봐.”

“아니야, 자기, 그냥 조금 긁힌 거야. 금방 괜찮아질 거야.”

“이리 손 내봐. 왜 그러고 있어. 이리 내! 손 당장 달라니까?”

작은 승강이가 생겼어요. 다들 쳐다보시는데… 내 마음속에서는 절박한 외침이 시작되었죠.

이 새끼야, 저리 좀 가란 말이다! 좀 가라고!! !!!’ 

어머, 이 교양 없는 말투는 뭔가요? 사랑하는 우리 남편한테 이딴 식으로 말하다니…. 이 털북숭이 자식! 금방 또 어디 갔어? 하여튼 네네, 맞아요, 구태여 쓴 문장을 지우는 일은 번거로운 일이죠.     

  결국 봉인되었던 제 손이 세상에 끌려 나왔고 캄캄한 곳에서 짓눌려 있다가 갑자기 밝은 빛을 봐서 어리둥절한 듯 상처는 많은 피를 뿜어댔어요. 남의 돌잔치에 축하해 주러 와서 난데없이 피가 여기저기 흩뿌려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 부끄러웠죠. 그런데요, 뭐랄까 제 마음이 갑자기 후련해지면서 오래 묵은 체증에 손을 딴 듯이 가슴이 답답했던 것이 나아졌어요. 네, 피가 많이 났지만 지혈은 되었고 다행히 세라믹 칼이 저의 손가락을 완전히 절단하지는 못했지요.


 그런데 다른 이야기지만 그 칼은 확실히 좋은 칼이었어요. 관심이 있으시다면 ##마켓 들어가셔서 비비드 세라믹 칼이라고 검색하시면 그 칼을 구입하실 수 있을 거예요. 후기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제품 퀄리티가 참 괜찮아요. 사이트에 적힌 후기 중에 위에서 세 번째 ‘제가 직접 사용해 보니 제품 상세 설명처럼 칼이 아주 잘 드네요. 특히 육류를 자를 때 단면이 너덜너덜해지지 않고 깔끔하게 잘리는 점을 칭찬하고 싶어요.’라고 쓰여 있는 것이 제가 쓴 거예요. 이왕이면 사진도 올려서 프리미엄 상품평으로 쓰고 포인트도 두 배로 받고 싶었지만 차마 사진을 올릴 수가 없어서 아쉽지만 그건 포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이렇게 차분하지만 우아하고 엽렵한 며느리를 자랑하고 싶으셨던 저희 어머니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고, 그래서 어머니께서는 몹시 시무룩해지셨어요. 좀 노여워하시는 것 같기도 했고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될 정도로 최선을 다해 멋진 며느리의 역할을 연기해보려고 했던 저의 마음도 말할 수 없이 슬퍼졌죠. 집에 돌아오는 내내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어요. 그 뒤로 저는 대내외적인 모든 과일 준비 업무에서 배제되었어요. 정 사람이 없으면 우리 남편을 시키시는 한이 있어도 이제 저에게는 과일 깎는 칼을 쥐어주지 않으시게 되었죠. 저는 그러면 몹시 울적해지고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자책하게 되는 한편, 일찍이 자유에서는 피 냄새가 난다던 김수영 시인의 말이 이런 의미였던가?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되는 거죠.


                                                                                                               2019. 4. 15. 윤정 올림

이전 05화 [소설] 나의 시댁 탈출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