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평온한 일상

사람이 게으르다는 것과 알뜰하다는 것은 같은 의미라니까요

by 알로

금요일 저녁 남편은 친구들과 등산을 가서 하룻밤 자고 온다고 했고 둘째는 파자마 파티를 하러 갔습니다. 큰아이는 수학 학원에 갔고요. 다들 연말이라고 친구들을 만나서 흥청망청 노는데 저는 그런 게 없어서 달수씨랑 둘이 넷플릭스를 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때 사놓은 초콜릿 케이크가 생각나서 한 조각 잘라 우유를 마시면서 함께 먹었습니다. 달수씨에게는 개껌을 주었습니다. 둘째가 친구들과 먹게 치킨을 시켜달라고 해서 5만원을 보냈습니다.


남편은 밤새 친구들과 맛깔난 회를 안주로 술을 마실 것이고 둘째는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나만 이게 뭐야? 울적한 마음이 들어서 초콜릿 케이크를 한 조각 더 잘라 먹었습니다. 접시에 옮겨 담으면서 이건 꼴통 녀석 몫인데 괜찮을까 싶었지만 설마 치킨도 보내줬는데 치사하게 굴까 싶어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오늘 점심 식사를 마쳤는데 둘째 녀석이 갑자기 케이크를 먹겠다며 냉장고를 열었습니다. 그거 24일에 산 겁니다. 28일에 그게 남아있을 리가 있나요? 남아 있어도 못 먹습니다. 그랬는데 얘가 또!!! 몹시 실망해서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서는 우당탕탕 문을 여닫으며 성질을 부리는 겁니다. 그릇장을 여기저기 뒤지더니 자기 포카칩까지 먹은 거냐며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건 정말 제가 안 먹었습니다. 그건 큰아이가 먹은 모양입니다.


그러더니 이불을 뒤집어 쓰고 복복 화를 내고 소파에 누워서 자기는 개산책을 못 나가겠다고 행패를 부렸습니다.


남편은 옆에 서 있다가 각자 자기 몫을 나누어 두었는데 케이크가 어떻게 없어질 수가 있지? 그럼 혹시 당신이 남의 케이크를 먹은 거야?라고 놀란 표정으로 물었습니다. 다 알면서 그러는 겁니다.


저는 남편을 쳐다보면서 아주 놀라 자빠지겠다는 표정을 지은 다음에 “그래! 내가 먹었다”고 고함을 질렀습니다. 너무 무안하니까 머리끝까지 화가 나더군요. 당신은 금요일에 친구들이랑 진탕 술 먹고 오고, 둘째는 친구들이랑 파자마 파티한다고 돈을 물 쓰듯 쓰는데 맨날 개미처럼 일만 하고 친구도 없어서 돈 쓸 일도 없이 달수씨 끌어안고 넷플릭스나 보는 내가 그까짓 케이크도 못 먹냐고 소리를 버럭 질렀습니다. 그 순간에 저는 방귀 뀐 사람이 성내는 심리를 정확히 알 수가 있었습니다. 정말 너무나 무안하니까 서러워지면서 화딱지가 나더군요.


사실 저처럼 돈 안 쓰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제 세수하고 로션을 바르려고 보니까 다 써서 없더라고요. 어디 굴러다니는 화장품이 없나 봤더니 예전에 고운발 크림을 사둔 것이 있었습니다. 다행이다 싶어서 뚜껑을 조심히 열어서 얼굴에 꼼꼼하게 바르고 생각난 김에 발에도 발랐습니다. 발에 바르고 남은 것은 다시 얼굴과 손에도 발랐고요. 제가 이렇게 알뜰한 사람입니다. 혹시 극단적으로 게으른 사람은 아니냐고 묻고 싶겠지만 그게 사실은 두 개가 같은 겁니다. 게으른 사람은 돈을 안 씁니다. 돈 쓸 일을 안 만들어요. 귀찮으니까요.


그뿐입니까? 동구밖 샴푸바를 올인원 바디워시로 사용한지는 몇 년 된 것 같습니다. 자랑 같지만 발가락 위에 난 털조차도 비단결처럼 부드럽다니까요.


내가 케이크 사다줄게. 그까짓 케이크 사다준다! 너희 이제 다 죽었어.


그러지 말라고 만류하는 인간들을 뿌리치고 제가 폭주해서 떡진 머리를 하나로 묶고 현관 밖으로 뛰쳐나가려는데 달수씨가 저보다 먼저 뛰어나갔습니다. 산책을 안 시켜서 그렇습니다. 다녀오자마자 산책을 나가자고 달수씨에게 사정사정해서 집으로 들여놓고 독기 가득한 얼굴로 골목길을 뛰어가 케이크를 샀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포카칩도 세 개나 사서 현관문을 열자마자 쾅 소리를 내면서 식탁 위에 올려놓고 소리쳤습니다.


너 빨리 와서 케이크 먹어.


안 먹어!


안 먹어? 빨리 와서 먹는 게 신상에 좋아!


저는 무섭게 으르렁거렸습니다. 아이가 앉았다 일어났다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빨리 앉아!!! 그래 어디 실컷 먹어봐라! 그렇게 소원하는 케이크 실컷 먹어!


저는 둘째 팔을 잡아 앉히고 차가운 표정으로 그 녀석을 응시했습니다.


그게 아니고...


결국 못 견디고 자리에서 일어나서 사과라도 하는가 싶었는데 그 녀석이 살며시 제 눈치를 보더니 우유를 한 잔 따라서 초콜릿 케이크와 냠냠 먹는 것이었습니다. 하긴 우유도 없이 먹기에 초콜릿 케이크가 너무 달긴 합니다.


뭐랄까? 이게 아닌데 싶어서 머리만 긁적이고 있었는데, 아까부터 옆에서 기다리던 달수씨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이제 산책 나가는 거냐고 물어보더군요.


달수씨, 아줌마 머리만 좀 감고 가자! 미안해.


얼른 씻고 기다려준 달수씨에게 간식을 먹인 다음 끈을 묶어서 데리고 나왔습니다. 개놀이터에는 강아지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날씨가 아주 좋아서 달수씨도 신나게 놀더군요. 햇빛을 받으면서 눈을 감고 있으니 기분이 좋았습니다.


이토록 평온한 일상이 주는 행복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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