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태어났다는 말

조용히 시작되는 회복에 대하여

by 운조



(Sarah Brightman, 〈When a Child Is Born〉에서)

그 노래는 늘 조용히 시작된다.

사라 브라이트먼이 부른 〈When a Child Is Born〉처럼,

기쁨도 확신도 없이.

다만 한 문장만 남긴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왜 이렇게 오래 남는지 알지 못했다.

구원도 아니고, 약속도 아니며,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세상은 여전히 어둡고,

사람은 여전히 아픈데

노래는 그 사실을 고치려 하지 않았다.


그저 아이가 태어났다고

조용히 말했을 뿐이다.



회복의 시간은 늘 화려할 거라 믿었다.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선이 있고,

그 선을 넘으면 모든 것이 달라질 거라고.


그러나 내 삶에서 회복은

언제나 그렇게 오지 않았다.


몸이 나를 앞질러 가던 날들,

기억이 먼저 멈추고

의지가 뒤늦게 따라오던 시간들 속에서

나는 ‘다시’라는 말을 쉽게 꺼낼 수 없었다.


그 대신

하루가 지나갔고,

그다음 하루가 또 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다.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처럼.


탄생은 언제나 연약하다.

아무것도 증명하지 않은 상태,

아직 이름조차 온전히 불리지 않은 존재.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가 오래 남는 이유도

그가 위대해서가 아니라

가장 무력한 모습으로 세상에 들어왔기 때문일 것이다.


울음으로 시작된 생.

보호 없이는

한 순간도 버틸 수 없는 몸.


회복도 그와 닮아 있었다.

의지로 걷지 않았고,

계획으로 나아가지도 않았다.


다만 넘어지지 않기 위해

가만히 숨을 고르는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나아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문은 열려 있는지,

아니면 아직 기다려야 하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예전과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 상태를

더 이상 실패로 부르지 않는다는 것.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이

그 자체로 하나의 시작이듯,

오늘을 버텼다는 사실도

충분히 생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조금은 믿게 되었기 때문이다.


노래는 끝까지 말하지 않는다.

앞으로 세상이 어떻게 될지,

이 아이가 누구로 자라날지.


그 침묵이 오히려

나를 오래 붙잡는다.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는 사실,

아직 가능성이 남아 있다는 여백.


회복이란

그 여백을 견디는 일인지도 모른다.


기적처럼 번쩍이지 않아도,

환호 없이 지나가도,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처럼

조용히 시작되는 삶.


그런 날들이 쌓여

나는 다시

오늘이라는 이름의 하루를 살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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