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흔적

미래의 나에게....

by 운조

---


 책상 위에 한 장의 편지지가 놓여 있다. 오후의 빛이 창문 틈으로 기울어 들어오며 종이 위에 사선으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빛 속에서 종이의 결이 더 뚜렷해진다. 아직 아무 글씨도 적히지 않았지만, 종이 위에는 이미 무언가의 무게가 내려앉아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미래의 나’에게 보낼 편지를 쓰려 한다.


 살다 보면 오늘과 어제가 너무 닮아 하루가 뒤섞이는 날이 많다. 지나간 날들은 이름도 없이 흘러가고, 내가 무엇을 사랑했고 무엇을 두려워했는지도 희미해진다. 하지만 편지는 다르다. 편지는 먼 거리를 전제로 한다. 오늘의 나와 다섯 해 뒤의 나는 서로 다른 두 섬에 있다. 편지는 그 사이를 건너는 다리다. 잉크가 마르는 순간, 문장 속의 감정은 저장되고, 단어 속의 의미는 발효된다. 봉인된 편지는 시간을 지나며 숙성된다. 그리고 언젠가, 그것을 연 손은 같은 사람이지만 또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나는 가끔 오래된 일기장을 꺼내 읽는다. 거기엔 유치한 문장과 삐뚤빼뚤한 글씨, 지워진 낙서의 흔적이 있다. 친구와 사소하게 다투고 울었던 날, 시험 문제 하나에 하루 종일 괴로워했던 날, 짝사랑하는 이름을 연필로 수십 번 쓰다 지운 종이. 그 시절의 나는 지금보다 덜 지쳤고, 세상을 덜 아프게 알았고, 꿈을 더 순수하게 믿었다. 부끄러움 속에서 애틋함이 피어난다. 종이 위의 흔적은 바로 그 믿음의 증거다.


 이번 편지는 가능한 한 구체적으로 쓰려고 한다. 다섯 해 뒤의 내가 잊어버렸을지도 모를 아주 작은 것들까지 담아두고 싶다.

 오늘 아침 창문을 열자마자 들어온 커피 냄새. 버스 창가로 스쳐 간 여름 끝의 느티나무 그림자. 책상 옆에 놓인, 표지가 해진 소설의 두꺼운 종이 감촉. 손님이 계산대에 두고 간 동전과 그 옆에서 반짝이던 초콜릿 포장지. 뜻밖의 문자 한 통에 잠시 멈춰 선 심장박동. 이런 사소한 풍경들은 다섯 해 뒤의 나에겐 사라져버린 계절일 수 있다. 편지 속에서만 다시 마주할 수 있는 빛, 공기, 온도, 냄새들.


 미래의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웃을 수도 있다. “그땐 그런 걸로 고민했구나.” 하고 가볍게 넘길지도 모른다. 아니면 문장 사이사이에 묻어 있는 지금의 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시울을 붉힐지도 모른다. 어떤 반응이든 상관없다. 중요한 건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를 위해 이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는 것도 좋지만, 가장 깊은 기록은 스스로에게 남기는 것이다.


 나는 쓰는 동안, 내가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조금 달라진다. 무심코 지나치던 버스 창밖의 풍경을 오래 바라보고, 평소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마셨을 한 모금의 아이스티 속에서 햇빛이 머무는 모습을 포착한다. 미래의 내가 읽을 이야기를 찾기 위해, 나는 지금을 더 유심히 살게 된다. 그렇게 오늘은 ‘기록할 가치 있는 하루’가 된다.


 영화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속 주인공은 과거의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다. “그때의 나, 제발 한 번만 더 웃어줘.” 그 장면을 볼 때마다, 나는 ‘편지’란 단순한 종이가 아니라 시간을 초월하는 다리임을 느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 한 구절도 떠오른다. “기억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는다. 하지만 그것을 믿을 수 있는 건, 기록이 존재할 때뿐이다.”

 아마 이 편지도 그럴 것이다. 언젠가, 이 문장들이 나를 증언해줄 것이다.


 편지를 다 쓰고 봉투에 넣었다. 주소란에는 ‘나에게’라고 적었다. 개봉일은 2030년 여름. 친구에게 이 편지를 맡길 것이다. 몇 년 뒤, 그 친구가 우편으로 보내줄 날을 기다리면서. 봉투를 봉하는 순간, 마음이 이상하게 가벼워졌다. 마치 오늘의 내가 미래의 나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해 둔 것 같은 기분이었다.


 2030년의 여름, 나는 어떤 표정으로 이 종이 흔적을 마주할까. 그날의 나는 이 편지를 열어, 종이 위에 눌러쓴 글씨와 잉크의 번짐을 손끝으로 더듬을 것이다. 그리고 알게 될 것이다. 변화와 상실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

 그때의 나는, 오늘의 나에게 고마워할 것이다. 아직 다 잃지 않은 마음으로, 여전히 종이 위에 나를 남길 수 있었던 이 순간을 위해.

 편지 속의 나와 지금의 내가, 시간이라는 강 위에서 잠시 손을 맞잡는 순간을 위해.


---2030년 나에게 보내는 편지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