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야기책 상징 읽기
글. 그림 조경숙 / 스푼북
영상작가전문교육원에서 시나리오 공부를,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HILLS)에서 그림책과 일러스트레이션을 공부했다. 아이와 어른 모두가 즐겁게 볼 수 있는 그림책을 만들고 싶어한다. 쓰고 그린 책으로 <줄다리기 한바탕> <내가 섬이었을 때>가 있다.
배를 완성한 늑대는 갈매기 먹이와 피리, 폭죽, 사진기를 챙겨 항해에 나섰다. 갈매기에게 먹이도 주기도 하고 피리도 불며 행복했다. 그런데 갑자기 커다란 배가 눈앞에 보이자 빨간 물고기가 고개를 내밀었다. 못 본 척 사진을 찍으려고 하는데 이번엔 날쌘 배 하나가 빠르게 지나가면서 늑대의 배를 흔들었다. 그때 빨간 물고기가 물 밖으로 나와 "배가 느려서 부끄럽다", "더 큰 배를 만들어 오는 게 낫겠다."고 계속 속삭여댔다. 늑대는 빨간 물고기가 점점 더 크게 흔들어대는 거친 파도와의 힘겨운 싸움에 지쳐 마침내 물고기에게 통째로 잡아먹혔다. 물고기의 깜깜한 뱃속에서 헤매던 늑대는 가까스로 폭죽을 찾아 타뜨렸다. 그 바람에 물고기 뱃속에서 밖으로 튀어나왔다. 늑대는 자신이 만든 배에서 하고 싶은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이젠 작아져 버린 빨간 물고기를 잡아서 집 어항에 넣어 놓고는 다시 항해를 떠난다.
표지부터 상징적이다. 커다랗고 빨간 물고기가 바닷물에 잠겨 있다. 표지의 투명한 겉껍질을 벗기면 물고기가 수면 위로 등장하는데 낚시에 걸린 모습이다. 오른쪽 구석에는 물고기에 비해 아주 작은 돛단배 위에서 누군가가 낚싯대를 잡고 있다. 이 물고기의 정체를 아는 것이 이 책 읽기의 핵심이겠다.
속 표지 그림은 주인공 늑대네 집 거실 광경이다. 카펫이 깔려 있고 푹신한 의자에 테이블, 보기 좋은 화분도 있다. 안락해 보인다. 늑대는 테이블에서 피리를 집어들고 있다.
오랫동안 항해를 꿈꿔 온 늑대는 집을 두고 바다로 나선다. 자기 힘으로 만든 작은 돛단배를 타고서. 늑대가 원하는 것은 현실에 안주하는 삶이 아니라 저 넓은 미지의 세계에서의 자유로운 삶이다.
바다 위에서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는 일에서 행복을 느낀다. 보고 싶었던 갈매기를 가까이서 맘껏 볼 수 있으니까. 바다 위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갈매기는 꿈이고 이상이다. 갈매기를 가까이서 본다는 것은 자기의 꿈에 한 발 가까이 간 것을 의미한다.
피리를 불 때는 더할 것 없는 뿌듯함을 느낀다.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는 자의 자유와 행복을 맛보는 순간이다.
그런데 시야에 커다란 배가 들어온다. 그와 동시에 바닷속에서 빨간 물고기가 고개를 내민다. 늑대는 모른 척하고 사진기를 꺼낸다. 배가 흔들려서 찍지 못한다. 이번엔 아주 빠른 배가 지나간다. 배가 더 심하게 흔들린다. ‘큰 배’, ‘빠른 배’는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더 잘난 대상이다. 나보다 훨씬 잘 나 ‘보이는’ 남을 의식할 때 세상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던 자아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빨간 물고기가 마구 튀어올라 자아를 흔들어댄다. “배가 너무 느려서 부끄럽다.” “큰 돛이 많아야 한다.” “돌아가서 더 큰 배를 만들어 와야 한다.”...
내 무의식 속에 있던 열등감이 하나둘씩 의식으로 올라와 자존감을 떨어뜨린다.
빨간 물고기는 또 다른 자아다. 내가 의식하지 못한 나의 내면이다. 내 삶에 만족하며 진취적인 삶을 살다가도 문득 나보다 훨씬 커 보이는 대상, 비교 우위에 있는 대상 앞에서 왠지 쪼그라드는 자아, 즉 열등감이다.
“배가 작아도, 빨리 갈 수 없어도 괜찮은데......” 하며 스스로 위안해 본다. 소용 없다. 이젠 아주 커져 버린 열등감이 나를 끌고 간다. 내 인생의 낚싯대를 내가 쥐고 당기는 삶이 아니라, 물고기에게 끌려가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미래를 향해 행복하게 나아가던 자아는 열등감을 느낀 순간부터 그것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자기 삶에 대해 회의를 품다가 마침내 절망에 빠지고 만다.
절망 속에서 늑대는 다시 생각한다. “잡으려고 했는데 잡힌 건가”라고.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려고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열등감에 사로잡혀 절망의 구덩이에 떨어졌음을 자각한다. 자각은 새로운 힘을 가져다준다. 늑대는 폭죽을 찾아낸다. 인생의 절정에서 터뜨리려고 했던 폭죽을 절망의 순간에 터뜨린다. 폭죽은 내 인생을 되찾을 뜨겁고 강렬한 용기이다. 열등감, 자기 회의, 자기 연민, 절망을 터뜨려 부숴 버릴 일생일대의 큰 용기이다. 폭죽과 같은 용기만이 스스로를 절망에서 꺼낼 수 있다. 늑대는 비로소 자신의 삶을 되찾는다.
빨간 물고기 뱃속에서 극적으로 탈출한 늑대는 혹독한 첫 항해에서 얻은 경험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한다. 아주 작아진 빨간 물고기는 버리지 않고 작은 어항에 넣어 두었다. 그의 존재를 기억하기 위해서다. 잊어 버리고 있다가는 언제 또 다시 수면 위로 튀어오를지 모른다.
늑대는 첫 항해의 경험으로 빨간 물고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 그것이 언제 고개를 내미는지, 얼마나 커질 수 있는지, 내 삶을 어떻게 흔들 수 있는지도. 그래서 또 다시 그것에 사로잡히거나 끌려다니지 않을 단단한 자아를 갖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것이 따라오지 못하게 어항에 넣어 놓고 항해를 위한 재출발을 한다. 찢어졌던 돛대를 잘 꿰매어 매달고서...
내가 주인인 삶은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하다. 만족이 있다. 그런데 남이 가진 것이 더 좋아 보일 때가 있다. 내가 가진 것이 초라해지며 만족감이 뚝 떨어진다. 그때부터 삶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내 것이 남의 것보다 못하다는 생각은 비교하는 데서 생겨난다.
늑대는 우리 모두의 모습이다.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다가도 남과 비교할 때 절망에 빠지기도 하는 우리의 모형이다. 우리는 절망 속을 헤쳐나와 더 견고한 행복을 찾아야 한다. 나에게 빨간 물고기가 있음을 인지하고 그것을 통제하며 내가 주인인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작가가 보내는 메시지이다.
우리 마음 속에는 빨간 물고기 말고도 다른 색깔의 물고기들이 들어 있다. 앞쪽 면지에는 수없이 많은 빨간 물고기가, 뒤쪽 면지엔 온갖 색깔의 물고기들이 가득하다. 우리 속의 물고기들을 잘 다스려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