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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세바쓰J Feb 02. 2022

끝내 커밍아웃 하지 못 한 언니 가장의 국민청원

정신건강 응급처치 프로그램의 도입이 필요합니다.

<커버 이미지-Mental Health First Aid 홈페이지 내 세계지도>

언젠가 우리나라 지도에도 색이 입혀지기를 바라는 마음.





청와대 게시판에 글을 쓰다


몸과 마음이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가면서 맨 처음 글을 쓴 건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이었다.

공식적으로 국민 동의를 구하려면, 먼저 한 달 동안 100명의 사전 동의를 받아야 한다는 걸 처음 알게 됐다. 그런데 나는 진심을 다해 글을 쓰고도 결국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리지 못했다. 그렇다. 어쩐지 용기가 나지 않아서 스스로 쉬쉬했다. 그래서 그 글은 끝내 ‘21-12-23 ~ 22-01-22, 사전 동의 미달’ 청원으로 덩그러니 남아있다.


이후 다시 용기를 내어 매체에 제보 기사를 썼다. 그러자 편집자분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전화를 하셨다. 바로 사회면 기사로 채택을 할 건데, 데스크에서는 개인적인 내용의 노출이 괜찮겠나 염려를 한다고 했다. 직장생활을 하다 마음을 다친 일을 공개하는 게 남들도 걱정되는 것이구나 싶은 생각이 스쳤지만 곧 나는,


그런가요..? 글쎄, 저도 이런 글을   처음이라서요. .. 그냥 전문가분들께 맡기고 싶습니다.”


그렇게 기사가 나갔다. 나 아닌 다른 세상이 읽는 첫 글이 되었다. 내 마음이, 어디든 나보다 힘 있는 곳에 닿기를 소망함과 더 힘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람은 보다 더 커졌다.


그 마음으로 또 한 번 용기 내어, 조용히 접힌 글을 다시 펼쳐본다.





정신건강 응급처치 프로그램 도입이 필요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40대 중반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노부모님의 자녀이자 세대주, 한 아이의 엄마이고, 한부모 가장입니다.


2021년 중반, 17년 차 직장인으로 생활하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로 3달 넘게 불면증에 시달리다 결국 F코드(정신의학과)의 질병과 고혈압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구조조정 서바이벌 전쟁터에서 부상자가 되어 몇 달을 힘겹게 보내고 있습니다.


밝고 명랑한 성격에 사교적이고 매일 운동으로 건강을 지키던 사람이라도, 가장에게는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직장에서 위협을 느끼자 걱정과 불안으로 잠도 밥도 운동도 사람도 모두 자연히 끊는 상태에 이르렀습니다.


어느 날 출근길 편의점에 들어갔는데, 무엇을 사야 할지 몰라 한참을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다 그냥 나오고, 다음날 또다시 카페에서도 같은 일을 겪으며… 그제야 문제가 심각함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지내고 있는 동안 하루 거의 대부분을 보내는 회사의 사람들도, 저녁시간 잠깐 얼굴 보는 가족들도 제 상태를 알지 못했습니다.


홀로 괴로움이 점점 늘면서 삶의 끈마저 끊고 싶다는 생각이 스스로의 의지와 관계없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갈 때, 결국 책임감으로 감추려 애쓰던 무너진 마음건강 상태를 가족들이 먼저 알아챘고 입원과 치료를 적극 추진하고, 도왔습니다.

그렇게 살았습니다.


'마음을 다치는 일'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를 당하여 '신체를 다치는 일'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는 살면서 처음 느끼는 종류의 공포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옆에 가족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찔한 생각이 듭니다. 마음이 마음대로 안 되는 것이 스스로의 의지나 생각, 기력의 차원을 넘어가면 전문적인 치료와 약물이 필요할 수 있다는 것도 비로소 알게 되었습니다.


더불어 남녀노소 불문하고 혼자인 사람들, 자기 자신과 가족들을 책임지고 이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저와 같은 상태를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추스르고, 누구에게 적절한 도움을 받고 이겨낼 수 있을지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스스로나 외부에서나 강인함을 강요받으며 버텨내야 하는 삶을 짊어진 사람들 특히 대한민국 가장들 중에 치료가 필요한 병 마저 홀로 지고 버티고 있을 것이 걱정됩니다.   


신체적인 질병과 안전에 대응하는 교육은 관련 분야 직업인들 뿐 아니라 학생들, 일반인 등에게도 잘 알려져 있고 교육의 기회가 주어지지만, 정신건강/마음/감정 문제에 대한 일반 대상의 교육은 현재 우리나라에서 거의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재난 후 트라우마 관련 심리적인 응급처치 교육과 의사들 심리학자들이나 작가들이 쓴 도서들은 있어도, 실제로 상당히 많이 현존하고 주변에서 자주 발생할 수 있는 정신질병들- 불면, 공황, 우울, 조울, 불안, 외상 후 스트레스, 섭식, 알코올 약물 중독, 자해... 등 에 대한 이해와 최초의 대응 및 개입과 관련한 구체적 가이드를 주는 체계적인 매뉴얼이나 일반인들을 위한 도서는 역시 국내에서 쉽게 찾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나라는 어떨까 찾아보기도 했습니다.   


"한국은 2003년부터 작년까지 2017년을 제외한 17년간 OECD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시아경제, 2021년 9월 28일)

"코로나 블루 국민 마음도 위중하다"

(중앙 SUNDAY 2021년 12월 18일 Special Report) 등 요즘 언론에서 그 어떤 뉴스보다 많은 빈도와 내용으로 우리의 정신건강, 자살 등의 문제점을 다루고 대책이 필요하며 개인을 넘어 지역사회와 국가의 개입과 시스템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상 가장 먼저 스스로를 지키고, 곁에 있는 사람들을 지켜야 하는 한 일반인-개인으로서, 가족-친구-동료로서 그리고 사회 구성원으로서 쉽게 가까이 다가가고 제공받을 수 있는 실질적인 정보와 교육은 전무하다고 봅니다.


수면제 한 번을 처방받아도 F코드로 분류되어 실비보험 가입조차 어려운 현실 속에서, 무엇보다 수많은 사람들이 정신질병에 대한 사회 낙인의 두려움과 그로 인해 개인 스스로가 높이 쌓고 있을 장벽 때문에, 적시에 적절한 도움과 전문적인 치료를 받아야 하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있지 않을까. 어쩌면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정신질병에 대한 무지함과 두려움을 처음 경험한 당사자로서 깊이 염려가 됩니다. 그런 걱정의 마음으로 본 청원을 올리게 되었습니다.


Mental Health First Aid (정신건강 응급처치) 프로그램은 호주에서 시작되었고, 현재 24개국에서 그 운동에 동참하고 있습니다. WHO추산 매해 거의 80만 명이 자살하며 이는 매 40초당 한 사람 꼴로 정신건강을 지키는 일을 글로벌 우선과제로 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총 4백만 명 이상이 교육을 이수했고, 아시아에서는 방글라데시, 홍콩, 인도, 일본, 말레이시아에서 운영되고 있습니다. 청소년, 일반인 등 대상 그룹에 따라 적합한 교육을 제시하고, 미국에서는 전 영부인이었던 미셀 오바마가 직접 그 교육을 받고 필요성을 알리기도 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개인적으로 이러한 교육을 받고, 강사가 되어 우리나라 사회에 기여하면 좋겠지만, Mental Health First Aid International Org. (정신건강 응급처치 관련 국제기관)에서는 개인에게 라이선스를 주지 않고 있습니다. 통상적으로 국가기관, 비영리 공인 기관, 사회적 기업 등이 적격 하다고 안내하고 있습니다.


국내 상황과 문화에 맞게 도입하고 승인, 관리, 유지 절차에 상당한 필요 기간(최소 18개월에서 2.5년)과 조건 그리고 비용 문제(시작 시점 최소 12개월 이상의 운영 가능 자금 보유)가 있고, 사람과 사회를 위하는 선의를 기반으로 장기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기관의 자격요건들이 까다롭게 명시되어 있기에 조직적인 힘이 필요해 보입니다.


국가든, 비영리단체/기관이든, 교육기관이든 사회적 기업이든 나서서 이 국제적인 운동과 이미 시행 중인 다른 나라의 경우들을 살펴보고 우리나라에도 이 Mental Health First Aid(정신건강 응급처치) 프로그램의 도입과 보급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그래서 가정, 학교, 기업, 사회에서 적절한 정보공유와 교육을 통해 어떤 문제든 커지기 전에 예방할 수 있도록 하고, 우리 모두의 마음 건강 복지가 실현되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저는 그 교육의 1호 수료자, 더 나아가 강사로서 필요한 곳에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앞으로 자살률 세계 1위 국가라는 악명을 내려놓을 수 있도록 나라와 전문적인 조직이 함께 힘을 합쳐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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