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를 하나 키우고 있다. 아기 때, 어린이집 때, 유치원 때는 아예 인생이 아이에게 포함되어 있었다. 자녀를 위해 산다기보다 그냥 자녀가 나였다. 그 어린 생명을 책임지는 아빠로서의 삶이라는 무게 앞에 나의 삶을 주장할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지금은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다. 이제 조금은 제 몫을 하려고 한다.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려는 제법 의젓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 대견하다. 하지만 아직은 어린이다. 챙겨줄 것이 많고 관심 가져줄 것도 많다.
육아를 하면서 집안일을 모두 해치우고 자기의 일까지 완벽하게 할 수 있는 슈퍼맨이나 원더우먼은 없다. 능력은 출중할지 모르나 유한한 시간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할 것을 선택한다. 지금 나의 인생에서 더 중요한 무언가를 위해 어떤 것을 포기한다. 나중에 되찾을 수 있을지, 나중에 채워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지금 더 중요한 가치가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선택했다. 직장에서의 성공을 위한 노력보다는 눈칫밥을 먹더라도 더 일찍 돌아와 아이를 돌보며 아내를 보살피는 데 힘을 쏟았다. 더 좋은 보수와 근무환경, 커리어적으로 나은지보다 가정에 시간을 더 쏟을 수 있는지 여부를 더 신경썼다. 아내 또한 마찬가지였다. 모든 것보다 아이를 위한, 가정을 위한 선택이 우선임을 처음부터 주장한 사람이 아내였다. 여러 친구들이나 동기들과 어울리며 사회 구성원으로써 제 몫을 다하는 직장인으로서의 삶은 없었다. 엄마를 선택했다. 우리의 선택은 '미래'보다는 '현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지만 돌이켜보면 우리 부부는 많은 것을 잃었다.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지 못했고, 미래를 위한 충분한 재원을 준비하지도 못했다. 경제적으로 윤택하여 코스요리를 먹고, 해외여행을 근교 드라이브처럼 즐기는 삶은 철저히 남의 일이다. 여전히 경제적으로 쉽지 않고, 지금도 여유보다는 미래를 향한 준비를 조금씩이나마 쌓아가는데 주력하는 평범한 인생이다.
그리고 우리는 '한 명뿐인 딸', 그리고 한 순간뿐인 '아이와의 교감'을 얻었다. 아이는 우리와 있는 시간을 제일 좋아하고 행복해하며 편안해한다. 나의 주관으로 바라본 편협된 시선일 수 있지만 우리 가족을 잘 아는 모든 이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주중 주말 가리지 않고 가능한 한 모든 시간을 아이와 보낸 결과다. 놀이터에서 같이 노는 것도 어느 가족보다 자연스럽다. 먼발치에서 아이는 놀리고 스마트폰만 본게 아닌, 같이 뛰고 같이 타고 같이 올라가며 호흡한 결과다. 딸아이의 친구가 된 동네 꼬마들은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든 자기네 아빠들보다 나랑 노는 시간이 더 길다.
같이 공유하다보니 딸은 우리에게 무언가를 감추려 하지 않고 있는 것을 더 자연스럽게 얘기하려 한다. 우리가 물어보지 않아도 오히려 더 자연스럽게 얘기하며 다가온다. 온가족이 같이 얘기하고 교감하고 나누는게 당연한 일상이었기에 어렸을적부터 몸에 배어 있다. 딸아이는 집안일로 바쁜 엄마의 머리를 묶어주고 엄마는 덤벙대는 아빠의 소지품을 챙겨주고 아빠는 지루함을 못 참는 딸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모습이 익숙하다. 우리 가족은 공간만 같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삶'을 실현하고 있다.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다. 인간 자체가 유한하다. 그래서 모든 것을 가지지 못하고 항상 선택해야 한다. 어떤 분야에서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면 무언가를 선택하고 포기해야 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한 삶의 법칙이다.
집이라는 같은 공간 안에 있어도 어색하고 같이 보내는 시간이 벋버듬한 가족이 많다. 대화가 이뤄지지 않는 가정들이 많다. 다른 여러가지 가치를 위해 '가족'을 너무 쉽게 포기한 결과가 아닐까. 물론 자신의 삶을 성공시키는 것이 궁극적으로 가족을 위한 길이라 역설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결과론적으로는 그렇다. 그러나 그것만이 유일한 답은 아니었다. 어쩌면 유일한 오답이었을지도.
오늘도 자기가 있었던 일을 스스럼없이 쫑알쫑알 얘기하는 딸, 얘기하다 기분이 좋아져서 애기 때처럼 폴짝폴짝 뛰어댕기며 노는 우리 딸. 밥 먹을때 그러지 말라고 말리면서도 웃음짓는 아내. 저녁 식탁을 보며 생각한다. 유한한 시간 속에서 내린 내 선택은 적어도 나에개는 옳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