덴마크: 해변가의 방주
ARKEN Museum of Modern Art (20230106)
루브르, 오르세, 오랑주리 미술관등 지금은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관들이지만, 예전부터 낯선 유럽의 미술관들을 잘 알았던 것은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거의 모든 정보는 미술 관련 책들을 통해서 얻은 거 같다. 해외 출장을 갔을 때 여유 시간이 생기거나, 가족 여행을 갔을 때 미술관과 박물관을 둘러보는 게 나의 큰 즐거움이었다. 큰 도시의 주요 미술관들은 어지간히 가 본 거 같은데,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여행자들이 잘 안 가는 도시나 소도시들을 가게 되면 참고할 자료가 별로 없었다. 그런 경우에는 구글에서 검색을 해보고 별표가 많이 붙은 곳으로 골라서 동선을 짰다. 별다른 정보 없이 찾아갔다가 의외로 너무 좋은 작품을 만나서 신이 났던 적도 있고, 기대 이상으로 좋은 소장품이 많은데 왜 별표와 방문자 리뷰가 별로 없을까 아쉬운 곳도 있었다.
이번 네덜란드 덴마크 지역을 여행하면서 꼭 가보고 싶은 주요 미술관들이 몇 군데 있었다. 여행 스케줄을 짜기 위해서 우선 구글 지도로 들어가서 목적지인 미술관에 표시를 하고 나서, 주변 미술관들 중에 가볼 만한 곳이 있는지 찾아서 또 표시를 한다. 별표와 리뷰 수가 많은 곳들 중심으로 고르고 추리면서 동선을 만들다 보니 난생처음 들어보는 미술관들도 가보게 되었는데, 그중에 한 곳이 코펜하겐의 ARKEN Museum of Modern Art이다. 가기 전까지는 별로 참고할 자료가 없었고 별표 옆에 붙어있는 리뷰 숫자도 많지 않았지만, 클래식 작품들로 가득한 유럽의 미술관 속에서 현대미술관이라는 점이 신선했고, 마침 코펜하겐 도심과도 꽤 가깝길래 방문하게 되었다.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 틈에서 나도 따뜻한 라테와 빵을 산다. 이름은 모르겠지만 위에 검정깨가 뿌려진 빵이 참 맛있다. 덴마크는 레스토랑의 빵은 말할 것도 없고, 기차역에서 빵을 사도 맛이 좋다. 코펜하겐 중앙역에서 기차로 남서쪽으로 15분 정도 이동하면 Ishøj라는 바닷가 소도시가 나온다. 15분이면 너무 가깝지 않은가. 빠른 기차도 아닌 아주 천천히 이동하는 기차를 타니 마음이 여유로웠다. 기차를 타고 바깥 풍경을 보다 보니 어느새 Ishøj에 도착해서 버스로 갈아탄다. 미국의 스쿨버스처럼 노란색인 버스가 일반 버스이다. 몇 정거장 지나서 금방 미술관 앞에 정차를 한다. 우리 말고도 몇 가족도 함께 하차를 했다. 문제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중에 버스에서 하차를 해야 했는데 이렇게 강력한 바람은 처음이었다. 미술관 입구가 그다지 멀지 않은데 앞으로 걸어 나갈 수가 없을 정도로 강력한 바람으로 가져간 우산살은 완전히 뒤집어지면서 꺾이고 휘어졌다. 옆 가족의 어린 아들은 걷다가 바람에 놀랐는지 울면서 뛰어가는데 미안하지만 너무 귀여웠다. 다행히 나올 때는 빗줄기가 가늘어져서 사진을 한 장 찍어보았다.
흔들 목마를 탄 소년이 손을 흔들며 환영 인사를 하는 듯하다. 이 조각은 현대판 기마상이다. 역사적으로 기마상은 왕과 군대의 힘을 상징하였지만, 흔들 목마를 탄 소년은 우리 시대를 보여준다고 한다. 오늘날의 우리는 권력에 경의를 표하지 않고 자아실현을 위해 살며 자존감을 소중하게 여긴다. 작가는 이 아이를 통해 승리와 패배만 있던 과거가 아닌 그 이상에 의미를 두고 사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나 보다. Elmgreen & Dragset라는 이름의 작가는 두 명이 한 팀으로 활동한다. 덴마크 출신인 Michael Elmgreen (1961)과 노르웨이 출신 Ingar Dragset (1969)은 1994년에 코펜하겐에서 만난다. 이때 Michael은 시를 쓰고 공연을 하고 있었고, Ingar는 연극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들은 1995년부터 같이 작업을 시작하고 1997년부터 베를린에서 활동하고 있다. 예술과 건축, 퍼포먼스, 설치등을 함께 하며, 우리의 정체성과 소속감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사회 문화 정치적인 제도를 한 번씩 짚어주어서 작품의 아이디어가 기발하고 유쾌하지만 의미는 가볍지만은 않다.
이 미술관은 1996년에 지어진 현대 미술관이다. 건축적인 면에서 굉장히 관심을 끌었을 거 같다. 바닷가의 인공 해변 옆에 지어졌는데, 마치 난파선과 같은 콘셉트로 건물이 놓여 있다. 젊은 건축과 학생이었던 Sơren Robert Lund는 거대한 해변가의 배를 닮은 디자인으로 건축 공모전에서 우승을 해서 업계를 놀라게 했다. ARKEN은 덴마크어로 ‘방주‘라는 의미라고 한다. 바이킹의 나라라고도 불리는 덴마크의 이미지를 담은 해양 건축을 보여주려는 콘셉트로 크고 무거운 철문을 사용하고 노출된 볼트와 금속들, 철제 계단등을 설치하여 미술관의 인테리어에서도 선박 내부의 느낌이 든다. 이런 차별화되고 대담한 디자인은 대규모의 현대미술과 아주 잘 어울린다. 주변의 바닷가는 매립지로 모래로 둘러싸여 있다. 계절이 좋다면 바닷가 쪽으로 산책하며 조각과 자연풍광을 느끼면 좋을 거 같지만, 일단 규모가 너무 크고 날씨도 안 따라줘서 나는 미술관의 카페에서 비 내리는 밖의 풍광을 감상했고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2층의 카페에 앉아서 모래밭과 마른풀들, 먹구름, 그리고 비바람을 보고 있자니 참 멋지다. Arken Museum of Modern Art는 400개가 넘는 덴마크, 스칸디나비아 전후 예술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다.
미술관 입구에 있는 ARKEN SHOP의 책과 예쁜 소품들의 디스플레이가 눈길을 사로잡았지만 일단 지하 1층으로 내려가서 관람부터 시작한다. Ugo Rondinone의 레인보우 작품 <where do we Go from here> (1999)이 눈길을 끈다. 미술관은 대형 작품들이 설치될 수 있도록 층고가 높고 문이 아주 컸다. 현대작품 위주로 여유 있게 공간을 쓰며 전시가 되어있는데, 솔직히 너무 현대 작품들이라서 내가 아는 작품이 거의 없었다. 작가이름도 작품도 다 낯설었다. 작품들의 사이즈도 커서 이런 현대식 대형 미술관 아니면 설치도 어렵겠다 싶었다. ARKEN의 소장품 중에서 한 작가의 작품 비중이 좀 컸는데, Anselm Reyle (1970)라는 독일의 예술가로 대규모의 추상화와 설치, 조각등 다양한 시도를 하는 작가이다. Foil painting 시리즈가 유명하고, 줄무늬 그림 시리즈도 사랑받는다.
권투 경기의 사각 링처럼 생긴 하얀색 매트리스 위에서 흰색 짐볼과 함께 방방 뛰어노는 아이들과 어른들이 눈에 띄었다. 조용한 미술관 안에 설치된 색다른 놀이 기구의 느낌으로 재미있어 보였다. 공의 크기는 3미터나 되는 아주 큰 풍선공이다. 이 작품의 제목은 <Giant Billiard>로 1967년에 비엔나에서 결성된 반항적인 건축가/예술가 그룹인 <Haus-Rucker-Co>에 의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건축가 Laurids Ortner, Günter Zamp Kelp, 그리고 화가인 Klaus Pinter가 모여서 만든 그룹으로 전통적인 건축과 고리타분한 사고에 도전한다. 나한테는 당구게임보다는 권투장으로 보이는데… 현대미술은 해석하기 나름이지 않나. Giant Billiard는 <Haus-Rucker-Co>의 프로젝트인 Vanilla Futures (1968-70)의 일부분으로 바닐라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맛있는 미래를 위하여 유머러스한 디자인으로 탄생했다. 이 작품은 원래 1970년도에 비엔나에서 처음 전시되었고, 같은 해에 뉴욕의 현대 공예 박물관에 전시가 되었었다. 50여 년 만에 다시 재창조되어서 ARKEN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이 그룹의 작가들은 시대가 급변함에 따라 유토피아적인 사회와 미래를 만들기 위하여 상상력을 풍부하게 담아서 의류와 가구 등을 디자인했다. 작가들은 지금도 각자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은 ARKEN의 소장품은 아니고 기획전시여서 다른 장소에서 또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이렇게 흥미로운 대형 현대 작품들을 관람하다가 기획 전시인 초현실주의 여류작가 Leonora Carrington (1917–2011)의 작품을 만나게 되었다. 영국태생인 화가는 인생의 대부분을 멕시코시티에서 활동하며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였기에, 멕시코 화가라고 하는 게 맞을 거 같다. 한 세기를 초현실주의 화가로 활동한 그녀의 작품과 일생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초현실주의는 세계 2차 대전이 끝나면서 함께 희미해졌지만, Leonora는 94세까지 장수하면서 초현실주의를 이어간 유일한 예술가로 남았다. 그녀는 화가이기도 했지만 여러 편의 소설과 인생 스토리가 담긴 회고록 등도 남겼다.
영국에서 섬유공장으로 성공한 가정에서 첫딸로 태어난 그녀는 곱게 키워서 사교계에 데뷔시키고 싶었던 아버지의 바람과는 정 반대로 자랐다. 아버지는 그녀를 수녀원 학교에도 보냈지만 바로 퇴학을 당해서 홈스쿨링으로 교육을 받다가, 어머니의 지지로 Chelsea School of Art 등에서 미술교육을 받게 된다. 일례로 그녀는 자신의 소설에서 부와 명예를 동물원의 하이에나로 표현하기도 하며, 유복한 가정 환경과는 상관없이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 나갔다. 연금술, 타투, 다양한 동물에 대한 집착, 인간과 기계와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며 소설과 그림 안에서 그 세계를 보여준다. 그녀는 런던과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작가들과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들과 어울리게 된다. Salvador Dalí, Picasso, Marcel Duchamp, Paul Klee, Man Ray, Francis Picabia, Henry Moore, 사진가 Lee Miller, 시인 Paul Éluard 그리고 운명적으로 만난 Max Ernst 등, 알고 보면 그들은 서로 간에 다 친구였다.
어느 날 파티에서 Max Ernst (1891-1976)와 만난 그녀는 한눈에 사랑에 빠진다. Max는 46세, Leonora는 20세였고, Max는 기혼남이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 사실을 알고 너무 화가 나서 Max의 포르노 작품 전시를 빌미 삼아 권력을 이용하여 체포하려는 시도까지 한다. 외동딸인 그녀는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Max와 함께 파리를 거쳐 Rhône Valley에 있는 Saint-Martin-d’Ardèche 오두막집에서 함께 지낸다. 사실 아버지만 피해 도망간 게 아니고 Max의 부인을 피해서도 도망간 거였다. 그녀는 오두막 집안의 벽을 물고기, 도마뱀, 말, 유니콘등으로 꾸미고, 테라스에는 조각을 만들어 두고, 정원에서는 공작새를 키우며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처음에 그들의 장소는 비밀이었으나, 점점 지인들이 놀러 오는 아지트가 되었다. 이 시기에 그녀는 계속해서 소설을 썼는데, Max와 그의 부인, 그리고 그녀 자신의 삼각관계를 허구로 표현해서 담기도 했다. 그녀는 Max와 함께하면서도 그의 뮤즈로 끝나지 않고 독립된 초현실주의 예술가로 인정받기 위해서 애를 썼다. Max가 초현실 화풍의 중심에 있었으니 서로 예술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깊은 대화가 가능했을 거 같다. 이렇게 그녀는 운명을 쫓아간다. 타고난 기질은 좋은 가정환경도 소용이 없나 보다.
그러던 중 세계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독일시민이던 Max는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다. 그녀는 그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했고, 시인 Paul Éluard의 도움으로 Max는 석방된다. 1940년도에 Max는 다시 체포되는데 이번에는 타락한 작품을 제작했다는 이유로 나치에 의해서 구속된다. Leonora는 또다시 불안감과 우울증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며 아버지에 의해서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게 된다. 그녀의 아버지는 Leonora를 남아프리카에 있는 요양소로 보내기 위해 간호사와 함께 동행시키는데 Leonora는 리스본의 항구의 카페에서 간호사를 따돌리고 뒷문으로 도망친다. 그녀는 파리에 있는 멕시코 대사관에서 근무하고 있던 친구인 시인 Ronato Leduc (1897-1986)를 리스본에서 만나 그의 도움으로 미국으로 자유를 찾아 떠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한다. 이때 어이없게도 그즈음에 석방된 Max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옆에는 그 유명한 Peggy Guggenheim이 함께 있었다. Peggy와 불륜 관계였던 Max는 Leonora에게 여전히 매우 사랑한다고 하며 뉴욕에 가서도 갈팡질팡 한다. 결과적으로 Max는 후원자였던 Peggy와 결혼해서 짧은 시간을 함께한다 (1942-1946) Max의 리스본 등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뭐 이런 남자가 다 있을까 싶었다. 사진을 보면 Leonora는 굉장한 미인이고, Max랑 정말 사랑하는 게 느껴진다.
1942년 말 Leonora는 뉴욕을 떠나 Ronato Leduc의 고향인 멕시코로 함께 간다. 그 이후로 다시는 Max를 만나지 않았다. 멕시코시티에 정착한 그녀는 유럽과 미국에서 망명한 예술가들과 어울렸다. 그 당시에 Frida Kahlo는 Leonora와 그녀 주변사람들을 향해 ‘그 유럽에서 온 암캐들’이라고 칭했다고 한다. 얼마 후 그녀는 Ronato와도 이혼하고, 헝가리 사진작가 Emerico Weisz Schwartz와 결혼하여 자식들을 낳고 끝까지 함께한다. 멕시코는 그녀가 초현실주의 예술을 탐구하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타로, 마야, 점성술, 불교, 전통자수, 목공예 등 폭넓은 문화를 접할 수 있었다. 1968년 멕시코시티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로 수백 명이 사망하고 그녀는 반정부 운동에 참여하면서 멕시코 정부의 체포 대상이 된다. 결국 남편 없이 뉴욕으로 도망을 가서 25년을 머무르며 외롭고 가난한 고통의 시간을 보냈지만, 1983년에 멕시코로 다시 돌아와서 그녀의 바람대로 영원히 그곳에서 지냈고, 그곳에서 생을 마감한다. 말이 25년이지, 그녀의 긴 인생 중에서 많은 시간을 도망 다니며 산 거 같아서 마음이 아팠다.
그녀의 인생 스토리에 놀라느라 그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그나마 쉬웠던 부분이라면, 뼛속까지 초현실주의자로 태어나서 운 좋게 런던과 파리에서 제대로 그 시기를 만난 거다. 초현실주의는 소리 없이 사라졌고, 다양하고 새로운 조류가 수없이 바뀌는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면서도 꿋꿋하게 초현실주의를 지켜낸 그녀의 고집이 놀랍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전쟁과 변화들을 겪어내고 대륙을 넘나들면서 어딘가에는 정착하고 삶과 예술을 지켜낸 그녀의 스토리는 흥남 철수작전을 겪으며 피난 내려와 대한민국의 발전에 이바지하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한 우리 윗세대 어른들 스토리의 글로벌 버전 같다. 초현실주의 분야에서 여성 예술가는 발붙이기 힘들었던 시절이었고, 멕시코 작가로는 Frida Kahlo만 아는데, 귀한 여성 작가를 발견하게 되어서 매우 의미가 있었다. 미술관들을 다니다 보면, 한국에서는 전혀 접해 보지 못했던 (나에게) 새로운 작가들을 만나게 되는데 이때마다 기쁨이 크다. 우리나라에서도 다양한 작가들의 전시를 유치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시진을 정리하며 그림들을 다시 들여다봐도 역시 나에게는 초현실 작품은 어렵게 느껴진다. 그래도 다른 작가들에 비해서는 사랑스럽고 예쁘게 표현된 부분도 많아서 한결 편안한 초현실주의 작품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