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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y golden age Jun 06. 2023

Kröller-Müller Museum 크뢸러뮐러

네덜란드: 자전거 타고 영화 속으로

Kröller-Müller Museum (20221221)


이 세상 종말이 임박했고 한 군데 다녀올 수 있는 카드를 받게 된다면, 난 Kröller-Müller Museum에 다녀올 거 같다. 아름다운 자연과 명작들을 한가득 품고 있는 숲 속의 미술관. 아직 못 가본 곳도 많고, 다녀본 곳도 적지 않지만 이곳은 내가 경험한 곳 중 최고였다. 어느 계절에 방문해도 다 좋을 거 같다. 심지어 내가 방문한 12월에는 외부활동에 약간 불편하다는 점을 감수하고도 완벽했다. 관람객이 없는 한적함 까지도. 이 보석 같은 작품들의 전시공간을 나 혼자 차지하고서 본다는 사실도 너무 감동스러웠다. 루트를 짤 때 암스테르담에서 충분히 당일치기가 가능하지만,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미술관 앞의 작은 도시 Otterlo에서 하룻밤 묵으면서 여유롭게 보길 권한다. 특히 첫째 날에 오후에 도착하더라도 바로 미술관으로 가서 몇 시간이라도 해질 때까지 보고 나오고, 그다음 날 또 아침부터 가서 충분히 즐기시길… 절대로 시간이 남지 않을 거다.



세계정세가 어수선한 1938년에 미술관이 세워지다니, 그것도 국립공원 안에. 더군다나 반고흐 뮤지엄 다음으로 반고흐 작품을 많이 보유하고 있다고 하니 어떤 배경으로 그럴 수 있었는지 너무나 궁금한 곳이었다.  겨울이라 De Hoge Veluwe National Park (호헤 벨루베 국립공원) 입구 매표소 앞은 한적했다. 국립공원 입장료를 내고 지도를 받아서 들어가니 수백 대 이상의 자전거가 질서 있게 정돈되어 있다. 자전거는 바퀴가 크고 브레이크 페달이 없고 모든 자전거의 뒷좌석에는 아이를 태우는 캐리어가 부착되어 있는 것이 굉장히 클래식하다. Kröller-Müller 부부도 그 시절에 이렇게 자전거를 타고 다녔을까. 마침 겨울코트에 모직모자를 쓰고 온지라 1930년대 감성으로 영화의 한 장면처럼 자전거를 타고 있는 내 모습에 스스로 흡족했다. 아침의 안개가 걷히는 중, 쌀쌀하고 촉촉한 공기에 코끝이 살짝 빨개졌지만 참 상쾌했다. 숲 속 길을 지나니 캘리포니아 사막 느낌의 작은 밸리가 나왔다. 이곳은 사슴, 노루, 멧돼지, 늑대, 여우, 담비등 야생동물들도 서식하는 천혜의 자연이 보존되어 있는 곳이다. 갈림길이 두어 번 있었는데 미술관 이정표를 따라서 신나게 달려간다. 파이프를 물고 연기를 뿜으며 자전거를 타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우리를 지나 앞서 나가는데 그들도 영화 속에서 나온 거 같다. 한 15분 정도 사진도 찍고 구경도 하며 슬슬 달려왔더니 나무숲 사이로 나지막한 건물들이 보이고 야외에 조각품들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한다. 자전거를 주차장에 세워두고 미술관을 향해 걸어간다. 상상 그 이상의 미술관이 숲 속에 있었다. 왼쪽 사진은 자전거 타는 딸의 뒷모습이고 오른쪽은 우리를 지나가는 노부부 모습이다. 내가 찍었지만 배경이 다 했다.



이 미술관을 만든 Helene Kröller-Müller (1869 – 1939)는 독일 재력가 집안의 딸로 네덜란드의 Anton Kröller와 결혼하고 양가로부터 사업을 물려받게 된다. 이 두 집안은 광산 철강 해운업으로 유럽에서 손꼽히게 부유했다. 부부는 네덜란드 전통에 따라 친정의 성 Müller와 남편의 성 Kröller을 모두 사용해서 Kröller-Müller가 되었다. (오호 두 성을 같이 쓴다… 합리적인 방법이네. 그러면 후손들의 성은 끝없이 길어지려나?) Helene는 일찍이 예술품 수집을 시작했고, 특히 반고흐의 천재성을 처음으로 알아보고 그의 작품을 모은 장본인이다. Helene는 35세 때인 1905년경부터 딸과 함께 화가 Henk Bremmer에게 미술을 배웠고 그는 Helene에게 현대미술을 소개하고 예술품 보는 법을 가르쳐줬다. Helene는 1907년에 처음으로 Paul Gabriel의 작품 <It comes from afar, 1887>를 구입하게 되었고 이를 시작으로 파리와 암스테르담 등지에서 열리는 경매마다 참여하면서 평생을 컬렉터로 살아가게 된다. Helene는 뛰어난 안목과 예지력으로 반고흐의 유화 90점, 소묘 185점을 수집하였고,  반고흐미술관 다음으로 많은 작품을 보유하게 된다. 1908년 Helene가 구입한 첫 번째 반고흐의 작품은 <Four cut sunflowers, 1887>였고, 다음 해에는 <The Sower, 1888>를 구입한다. 그녀가 처음부터 안목과 결단적을 가지고 있었던 거 같지는 않다. Georges Seurat의 <A sunday aftenoon La Grande Jatte>를 구매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의 멘토인 Bremmer가 그 작품을 구입하지 말라고 조언하는 바람에 포기했다. 아쉽게도 그 작품은 인상주의의 한 획을 긋는 중요한 작품이었다. 그녀는 빠르게 후회를 접고, 다음 기회에 같은 작가의  <Le Chahut>를 구입하며 아쉬움을 달랜다. 이 작품은 Seurat의 대타 작품이 아닌 대표작으로 위풍당당하게 전시되어 있다. 그렇다고 그녀가 선택한 작가가 모두 다 반고흐 작품처럼 인정받고 인기를 얻은 것은 아니었다. Helene는 네덜란드 작가인 Bart van der Leck의 작품을 400점 이상 구매 했다는데 이 작가는 존재감조차도 그다지 알리지 못하고 사그라든듯하다. 혹시 어느 날 학자들에 의해서 재조명을 받게 되고 화제가 된다면 수장되어 있는 컬렉션이 빛을 볼 수도 있겠지만.



이 미술관 부지는 남편 Anton이 47세인 1909년부터 사냥터로 쓸 목적으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개인 사냥터로  구입했다니 그들이 가진 부의 규모는 가늠이 안된다. 지도로만 봐도 넓은 이 공원의 면적은 55 km²으로 아무튼 엄청나게 넓다. Helene는 1910년에 이태리 피렌체 여행을 하면서 박물관을 지어야겠다는 아이디어를 얻는다. 우선 그녀는 헤이그에 전시장을 만들고 그때까지 수집한 작품들을 대중들을 위하여 전시하는데 그 당시에는 이렇게 현대 미술을 관람할 수 있는 곳이 없었다고 한다. 1차 세계대전 때는 Helene도 모든 것을 내려놓고 부상당한 군인들을 간호하는데 헌신을 다 했는데, 한편으로 이 세계대전은 Kröller-Müller 부부의 회사에 높은 수익을 가져다주게 된다. 전쟁덕으로 Helene는 더 많은 작품을 구매할 수 있었고 이때 구매한 작품 중 하나는 Auguste Renoir의 <The clown>이다. Kröller-Müller 부부는 De Hoge Veluwe 공원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곳에 박물관을 짓기로 한다. 그러나 설계를 하고 큰 자금을 조달해서 독일에서 사암 수입까지 진행하던 중인 1922년에 글로벌 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부부는 파산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건설은 중단되었다. 상황은 곧 호전되었지만 큰 위기를 겪었던 부부는 어떤 상황에서도 미술품을 지켜낼 수 있도록 재단을 설립하고 수집품 12,000점과 공원 전체를 네덜란드 국가에 기증한다. 기증하는 조건은 단 하나, 국가에서 공원에 대형 박물관을 지어주는 거였다. 중단되었던 건설은 재개되었고 Helene가 네덜란드 정부와 긴밀한 협조를 하며 건축을 진행시킨다. 1938년 박물관은 마침내 오픈하게 되었지만 곧바로 이어진 세계대전으로 휴관에 들어간다. 그들은 작품들을 방공호에 보관하며 지켜내었다. Helene는 70세의 나이로 1939년에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다행인 거는 그녀가 1938년에 박물관 오픈을 지켜볼 수 있었던 점이다. 이후 1948년에 조각정원을 새롭게 조성 오픈했고, 여러 번의 확장을 통해서 지금의 미술관 모습으로 숲 속을 지키고 있다. 현재 정원 전체에는 160개 이상의 조각품이 설치되어 있다.



Helene 옆에는 예술품 컬렉션과 큐레이팅을 도와주는 직무를 맡은 사람들이 계속 있었다. 초기에는 미술 선생님이자 화가인 Henk Bremmer가 컬렉터 인생시작을 세팅해 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다. Helene가 남긴 3400통의 편지를 보며 그녀의 일생을 연구한 Eva Rovers에 따르면 그녀에게는 쏘울 메이트가 있었다고 한다. 1906년 Helene의 첫딸은 동급생들과 하키 클럽을 만들었고 Sam Van Deventer도 그 팀의 일원이었다. (그렇다면 딸의 친구란 말인가?) 졸업 후에 Anton은 Sam을 회사로 초대했고 결론적으로 Sam은 부부의 회사에서 평생 일하게 된다, 아니 그 이상의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Helene와 Sam의 관계는 1908년부터 그녀가 사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그들은 서로 장문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때에는 하루에 몇 번씩도 편지를 썼다. 그들이 한도시에 머무르고 있을 때에는 함께 산책하며 시간을 보냈다.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를 보면 어떤 관계로 만남을 유지한 건지 조금 알 수 있다. Helene는 Sam과의 관계로 인해서 딸과는 문제가 생겼지만, 남편과의 관계에는 이상이 없었다. 매우 개인적인 나의 생각으로는 Anton이 Helene를 믿었다기보다는 그녀가 몰입해 있는 컬렉션 세상을 시시콜콜 다 들어주며 함께하기가 귀찮아서 Sam에게 그 역할을 떠넘긴 게 아닐까 싶다. (50대 기혼자로서 딱 들어보니 그들의 심리상태가 느껴졌다. 경제공동체로써 이혼까지 갈 필요는 없었을 거고. 적당히 잘 지내고 싶었던 Anton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녀는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과는 별개로 컬렉션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느꼈을 거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민감한 부분은 암묵하에 셋이 함께 다니는 이상한 조합을 유지하게 된다. 편지내용을 보면 Helene는 Sam을 많이 의지한듯하다. 박물관 설립을 의논할 때도 Anton은 Helene에게 충분한 공감을 해주지 않았고 이에 불만을 느낀 그녀는 Sam에게 얘기하면서 정신적인 결핍을 채우며 공감받길 원한 거 같다. 어쨌든 그들은 서로에 대해서 매력을 느끼고 갈망했으며, 독특하지만 깊은 플라토닉 사랑을 한 거 같다. Helene가 컬렉터로써 박물관 설립이라는 큰 일을 해내기까지 정신적인 서포트는 남편이 아닌 Sam에게서 받은 듯하다. 물론 경제적인 조달은 남편에게 받았겠지만.



미술관 앞 정원에서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빨간색 조각이 포인트다. <포터블 화분>이라는 제목으로 자루 안에 담긴 식물들도 정원에 놓여 있었다. 날씨가 급변하기 때문에 지체 말고 미루지 말고 카메라에 원 없이 담아야 한다. 시시각각 구름이 변한다. 반고흐 작품들은 4번째 방에 있다는 정보는 갖고 있었지만, 뷰가 너무 예쁜 카페테리아에 앉아서 커피를 마시며 한숨을 돌리고 4번 방을 제외한 다른 방부터 보기 시작한다. 큐비즘 작품들을 모아뒀는데 컬렉션도 너무 대단하고 그 멋진 작품들을 그룹핑해 둔 큐레이팅에 또 한 번 놀란다. 큐비즘 작품들을 그렇게 좋아하진 않았었고 사실 별로 관심 없는 분야인데 작품들을 너무 잘 묶어둬서 그런지  한눈에 쏙 잘 들어온다. 이름조차 낯선 작가들도 많았고 큐비즘의 느낌이 너무 신선했다. 조각의 방도 있고 현대 독일작가의 작품들도 있다. 마침내 4번 방으로 들어간다. 양옆으로 줄지은 대작들-Claude Monet, Georges Seurat, Pablo Picasso, Piet Mondrian-을 애써 외면하며 제일 안쪽의 반고흐 방까지 직진했다. 멀리서부터 보이는 그의 작품들이 한 줄로 서서 관람객들을 맞이한다. 이렇게 귀한 작품들이 골고루 방 하나에 한가득 있다니 정말 어쩔 줄을 모르겠다. Helene가 이 세상을 떠날 때에 일렬종대한 반고흐 작품들 앞에 꽃다발을 놓고 빈소를 차렸다니 감동적이다.



한 작품씩 순서대로 설명을 읽으며 자세히 들여다본다. 붓터치를 뚫어져라 보면 그의 마음이 느껴진다. 두껍게 올려져 있는 물감색들도 참 신비롭고 조화롭게 섞여있다. 가까이서 보면 그저 짧은 붓터치일 뿐인데 조금 떨어져서 보니 꽃밭을 그린 거였다. 그 유명한 <The Cafe Terrace>의 밤하늘의 별들도 가까이서 보니 환상적이다. <Pink Peach Tree in Blossom> 분홍색 꽃이 만발한 한그루의 나무, 이 그림은 고흐의 다른 작품들과 좀 분위기가 다르게 느껴진다. 소극적이고 얌전한 붓터치와 파스텔톤의 옅은 색상도 마음에 든다. 반고흐의 특징 중 하나는 한 소재를 가지고 여러 번 혼심을 다해서 그렸다는 거다. 그래서 우리가 미술관을 다니다 보면 반고흐의 해바라기를 이 미술관에서도 보고 저쪽 미술관에서도 보게 된다. 감자 먹는 사람들도, 침대와 의자 그림도, 우체국아저씨초상화도, 마담들 초상화도, 그리고 자화상까지도 한 가지 주제를 여러 번 그렸기 때문에 어느 미술관에서 본 거 같은데… 어디서 봤지? 내 기억을 끌어내기가 어렵다. 그래서 반고흐 작품집은 꼭 한 권 갖고 있기를 추천한다. 반고흐의 해바라기도 여러점 이라서 내 기억에 의존할 수가 없다. 고흐의 책을 펼쳐놓고 보니 시기별로 꽃의 모양이 어떻게 다른지, 어느 미술관에서 소장 중인지 한눈에 볼 수 있어서 정리가 된다. 정말 이곳에는 고흐 작품으로 꽉 차 있다. Helene의 안목도 로또당첨급이지만, 반고흐 생전에 그림 판매가 되지 않은 덕분에 작품들이 흩어지지 않아서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을 거 같다. 순수하면서도 공들여 힘겹게 그린 초기 작품들을 오래오래 천천히 보고 싶었다. 참 잘 그렸다. 어두운 톤의 초기가 지나면서는 서서히 그림에 색이 입혀졌다.



반고흐 작품을 전체적으로 보면 과수원 그림이 참 다양하고도 많다. 과수나무 이름도 구체적이다. 자두나무, 살구나무, 복숭아나무, 배나무, 아몬드나무 그리고 이 그림들은 대부분 다 Arles 아를에서 머무르던 시기인 1888-1889년 정도에 그려졌다. 특히 3월부터 4월 과실수의 꽃이 만개하던 이 한 달 동안에 14점이나 그려냈다. 남프랑스의 태양과 밝은 하늘아래 아름다운 기후는 고흐가 내면에 품고 있던 색채를 다 꺼내서 작품에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 듯하다. 고흐는 눈앞에 펼쳐진 과수들과 반짝이는 별빛을 보며 1년 동안 200여 점의 작품을 쏟아낼 수 있었다. 이들 중에는 언제 봐도 황홀감을 느끼게 해주는 명작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노란빛과 주황색 사용으로 강한 태양의 기운으로 품기도 하고, 짧은 붓터치와 테두리 선으로 강하고 긍정적인 느낌을 주기도 한다. 고흐는 이곳에서 잘 지내다가 후반부에는 정신발작과 고갱과의 다툼 끝에 자기 귀를 베어내는 사건을 저지르기도 한다. 그래도 고흐는 차분하게 그림을 계속 그렸다. 나는 마담 룰랭부인과 우체부 룰랭 아저씨의 초상화를 좋아한다. 초록색이 이렇게 세련되고 예쁠 수 있나. 고흐의 해바라기도 아를에서 그린 것들이 가장 활짝 피어있고 풍성하다. 아무래도 해바라기가 가장 아름다운 시기일 가을 햇살아래에서 직접 보고 담아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고흐는 자신의 마음을 치료하기 위하여 스스로 옆 동네인 Saint Remy De Provence 생 레미 드 프로방스의 요양원으로 떠난다. 그는 이곳에서 1889년 5월부터 1890년 5월까지  딱 1년을 머물렀다. 이곳에서 그린 <꽃이 핀 아몬드 나무>를 제외하고는 소용돌이치는 물결 그림이 눈에 띄게 보인다. 아를의 스위트한 과수원 느낌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나무들은 꼬불꼬불 곡을 갖게 되고 가지도 물결처럼 춤을 추기 시작한다. 땅도 하늘도 산등성이도 함께 정신없이 움직인다. 이때 그린 나무들이 올리브나무, 뽕나무 (mulberry), 사이프러스, 포플러, 소나무, 그리고 밀밭이다. 나무들의 선만 봐도 고흐의 마음과 정신의 불안감을 느낄 수 있다. 어두움 속에서도, 화려함 속에서도 색상 선택이 정말 화려하다. 고흐는 색상 천재이다. 반고흐 생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팔린 단 한 점의 그림은 러시아 푸슈킨에 있는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었다. 나무종류 구별 잘 못하는 나는 여태까지 나지막하고 꼬불꼬불한 나무들이 다 포도나무인 줄 알았는데 자세히 공부해 보니 올리브였다. 생레미 시기에 올리브 나무만 십여 점을 그렸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고흐의 그림 중에 포도밭 전경은 두 점 밖에 없나 보다. 붉은 포도밭 외에 또 한 점은 <Vineyards with a View of Auvers>로 이 작품은 Saint Louis 미국에 있다. 고흐가 아를 시기와 생 레미 시기에 그린 나무 특징을 눈여겨보는 것도 관람에 재미를 더 해 준다.



야외의 조각공원은 무려 25 헥타르나 되는 규모이고, 미술관 안내 지도를 보니 산을 넘어가면 작품들이 또 많이 있다고 나와있는데 도대체 정원이 얼마나 넓은 건지 감도 오지 않는다. 욕심내지 않고 기분 좋은 산책을 하며 적당히 둘러보았다. 유명 작가들 작품이 많기도 하고, 작품과 공간이 너무 잘 어울리도록 배치되어 있었다. 겨울이라서 작품이 찬 온도와 습기에 훼손될까 봐 커버를 씌워두기도 했다. 유럽의 잔디는 겨울에도 초록색이고 아직 쌓여있는 낙엽은 진붉은색으로 대비되는 색상이 조화롭고 따뜻하다. 이곳의 겨울은 기온이 낮지는 않지만 비가 많이 오는듯하다. 3시경에 미술관을 나서는데 이미 어둠이 깔리고 있었다. 해가 정말 짧다. 미술관은 5시까지 열려있지만 너무 늦게 나오면 불빛이 별로 없는 공원에서 다시 자전거를 타고 출구를 찾아 나오기가 좀 무서울 거 같다. 혹시라도 멧돼지라도 마주칠까 봐 서둘러 페달을 밟았다. 우리는 공원 앞 마을에서 하룻밤을 더 보내고 다음날 암스테르담으로 향했다.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뮤지엄이다. 기회가 되면 다른 계절에 다시 와서 정원에서 맥주도 마시며 천천히 조각들도 둘러보고 싶다.



Otterlo 오텔로 마을은 아주 작고 평화롭다. 그림 같은 집들이 여유롭게 있고 집옆의 농장에는 염소나 말이 한가롭게 노닐고 있다. 이곳 네덜란드 마을에 웬일인지 캐나다 국기가 군데군데 걸려 있어서 의아했는데 호텔 근처를 산책하다가 전쟁추모비를 보게 되었다. 1945년 4월 16일 밤 이 마을에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가 있었고 그때 몸 바쳐서 싸워준 연합군중 캐나다인들의 사상자가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지금도 일상생활 중에 그들을 추모하며 매일 활짝 핀 생화를 추모비 아래에 갖다 놓고 있었다. 6 25 전쟁 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희생된 유엔군 사망자는 3만 7천902명이고, 오텔로 전투에서 희생된 사망자는 캐나다인 17명, 영국인 6명, 민간인 4명이었다. 우리가 겪은 전쟁의 규모해 비하면 작은 전쟁이라 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지금까지도 마을 한복판에 캐나다 국기를 걸어두고 마을을 지켜준 것을 감사하며 그들의 희생을 기리며 추모하는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보며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우리는 우리의 전쟁과 고마움을 너무 잊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과 인접해 있는 지역에서 이 많은 컬렉션을 전쟁으로부터 지켜내고, 개인의 파산으로 인해 작품이 흩어지지 않도록 재단을 만들고 나라에 기증하고 국가 차원에서 관리하도록 결단을 내린 Kröller-Müller 부부의 판단도 참 존경스럽고,  오텔로 주민들이 보여주는 가치관도 참 성숙하다고 느껴진다. 이 작은 마을은 기회가 될 때마다 오고 싶은 곳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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