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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언주 Nov 13. 2022

크라잉 클럽

9화

  어서들 오세요.

  검정 카디건을 걸친 윤미오가 우리를 맞았다. 환하게 불을 켜 놓은 실내는 환기가 덜 되어 눅눅했다. 한쪽 구석엔 정리 안 된 빈 병이 어지럽게 세워져 있었다. 나는 연거푸 재채기가 나왔다. 

  제습기를 돌렸는데도 이래요. 

  어떻게 된 일이에요?

  모르겠어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요. 아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보았는데 어떻게 손쓸 방법이 없네요. 퇴폐 시설이라고 무조건 폐쇄하라는데 답답해 죽겠어요. 

  윤미오는 먼지가 앉은 와인 한 병을 꺼내 왔다. 아끼던 건데 송별회에 쓰게 될 줄 몰랐다고 했다. 남 영사는 술을 섞어 마시면 취한다면서도 윤미오가 권하는 와인을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그는 재킷을 벗어 등받이에 걸쳐 놓고 셔츠 소매를 걷어 올렸다. 취기가 오르는지 윤미오에게 양해를 구하고 담배를 꺼내 물었다. 

  어떻게 버틸 방법은요?

  방법이 있으면 진작 찾았겠죠. 사는 게 뭔지 정말 모르겠어요. 왜 나한테만 이러는지. 

  나는 잠자코 듣기만 했다. 흘깃 바라본 윤미오의 얼굴이 오래된 벽지처럼 누렇게 찌들어 있었다. 자기 세계에서 거부당한 그녀에게 어떤 위로의 말도 필요 없어 보였다. 남 영사는 담뱃불도 끄지 않고 턱을 고인 채로 졸고 있었다. 

  김 선생님은 아내가 중국인이라고 하셨죠.

  무슨 소린가 싶어 나는 고개를 들었다. 

  좋으시겠어요.

  윤미오는 남 영사의 손가락에서 담배를 뽑아 비벼 껐다.

  미래의 전처가 중국인이긴 하죠.

  재밌는 분이네요. 아직 같이 살기는 살고요? 

  윤미오가 피식 웃으며 내 말을 받았다.

  나는 아내가 혼자 캐나다에 갔다고 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래의 전처라는 말이 영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아내와 통화를 못 한 지 며칠 되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서운한 마음 때문에 메이가 남처럼 멀게 느껴졌다.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며 여기도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윤미오는 따라 놓은 와인은 입도 대지 않고 잔을 빙글빙글 돌리기만 했다. 나는 치즈 한 조각을 들었다가 접시에 내려놓았다. 

  서울로 가시는 겁니까?

  내가 다시 물었다. 

  갈 데가 또 어디 있겠어요. 그런데 돌아갈 집이 없네요. 

  집이라는 단어를 들은 남 영사가 아, 씨! 하고는 다시 푹 고꾸라졌다. 윤미오가 씁쓸하게 웃으며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허공으로 연기를 뿜어내는 윤미오를 보며 나는 울적해졌다. 

  사업성 있어 보였어요. ‘우는 사람들 모임’ 매력적이잖아요. 타국에서 겪는 설움이나 애환을 풀 데가 있다는 게. 멀쩡한 사람들이 우는 장면, 상상만 해도 재밌지 않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만 들여다보지 남의 인생 따위는 관심 없더라구요. 좋은 울음 터를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참 어렵다! 

  윤미오가 남 영사를 흔들어 깨웠다. 귀에다 대고 뭐라고 했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와인 말고 다른 술은 없는지 물었다. 취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기분이었다. 출입구 옆의 커다란 창을 바라보았다. 비가 내렸고, 지나가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고, 유리창은 실내를 그대로 담고 있었다. 졸고 있는 남자 옆으로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 여자와 남자. 붉은 조명 때문에 손님 끊긴 정육점 정물화 같았다. 

  차를 한잔해야겠어요.

  윤미오가 어색한 침묵을 깨뜨렸다. 그녀는 술은 된 것 같다며 주방으로 갔다. 나는 어딘가를 지켜보고 있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았다. 윤미오가 내온 밀크티는 표면에 응고된 막이 떠 있었다. 정말 마지막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나는 티스푼으로 둥둥 떠 있는 막을 건져 냈다. 

  회원들과 함께 파티를 해야겠죠.

  윤미오가 실내 조도를 낮추고 스크린을 켰다. 크라잉 클럽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영상이었다. 사람들이 들어오고. 회원들이 인사를 하고 포옹하기도 했다. 자하르와 주먹인사를 하는 내가 웃고 있었다. 

  움직이는 짤로 쓰려고 만들었던 거예요. 

  잠시 말을 끊은 윤미오는 오픈 채팅방에 올리려고 찍은 동영상이라고 했다. 물끄러미 윤미오의 눈을 보았다. 서늘한 눈빛이 주는 어떤 힘이 적막을 채우고 있었다. 화면이 점점 어두워졌다. 빛을 잃은 사람들의 실루엣이 서서히 떠올랐다. 몸을 숙인 사람의 굽은 등이 흔들리고, 어떤 사람은 턱을 괴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사람, 몸을 뒤로 눕히고 잠든 사람도 있었다. 일상이 주는 평온이 눈물 나도록 그리워졌다. 그때 등받이에 걸쳐 둔 재킷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전화기를 꺼내 들고 나는 밖으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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