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신도시 아파트 입주가 시작되고 크라잉 클럽에 갈 여유도 없이 바빴다. 어느 날 민항구 공안국에서 전화가 왔다. 한광수에 대해 참고인 조사할 게 있다고 했다. 장닝구 원룸에서 외국인이 고독사한 사건 때문이었다. 공안은 한광수와 마지막으로 통화한 사람이 나라는데 모르는 이름이었다. 주변에 수소문해 보았지만, 아는 사람이 없었다. 총영사관 남 영사는 공안에 다녀오면 내게 전화나 한번 해 달라고 부탁했다. 마리오의 한국 이름이 한광수라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공안국에서 나오다가 윤미오에게 전화했다. 연결이 되지 않았다. 몇 번이나 찾아가도 와인 바는 내부 수리 중이라는 안내만 붙어 있었다. 라이브 채널도 열리지 않았다. 구락부 문이 닫혀 있는 동안 교민 사회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떠돌았다. 여사장이 단속에 걸렸다는 소문도 있고, 구속되었다고도 했다.
하루하루가 덧없고 지루했다. 그러다 돌아보면 어느새 한 달이 훌쩍 지나갔다. 채 바퀴 돌리듯 일과를 보내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술집을 찾아다녔다. 아내와의 감정은 지도상에서 멀어진 거리만큼 벌어지기만 했다. 낮에 메이에게 전화가 왔다. 내가 맨정신으로 있을 때 보내는 최후의 통첩이었다. 사무실에서 언성을 높이다가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갔다. 메이는 나더러 짐을 싸서 당장 캐나다로 오든지,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홧김에 갓길에 세워 둔 차를 발로 걷어찼다. 사이드미러가 떨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숨이 막혔다. 손바닥에 힘을 주고 목을 꾹 눌렀다. 언젠가 마리오의 목구멍에서 쏟아져 나올 것 같았던 검은 새의 대가리가 떠올랐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허리를 굽혀 사이드미러를 주워 들었다. 거울에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작은 글씨가 씌어 있었다. ‘사물이 거울에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나는 그 글자들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주위의 건물들과 빽빽한 간판들이 거울 속으로 거꾸로 쏟아져 들어왔다. 눈앞이 핑 돌아 가로수에 몸을 기대고 섰다.
그래서 어쩌라고.
가로수에서 말매미가 목이 터지라고 소리 내 울었다.
남 영사가 한번 만났으면 했다. 낮에 선약이 있다고 하자 그도 저녁이 좋겠다고 했다. 난징루 근처 한국 식당에서 약속을 잡았다. 남 영사는 길이 밀렸다며 이십 분 정도 늦게 나타났다. 그는 물수건을 펼쳐 손을 닦고 목 뒤까지 닦았다. 그날따라 많이 지쳐 보였다. 옆자리에서 대여섯 명의 학생들이 한 테이블에 끼어 앉아 있었다. 떡볶이와 분식을 종류대로 시켜 놓고 시끄럽게 떠들었다. 아이들이 이쪽을 힐끗거리며 띄엄띄엄 말을 흉내 냈다. 남 영사가 가리키는 구석으로 우리는 자리를 옮겼다.
떠나기 전에 술이나 한잔하자고요. 그동안 신세를 많이 진 것도 있고.
남 영사는 곧 한국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막상 돌아가도 답답한 일뿐이라고 푸념을 늘어놓았다. 나는 서울의 전세난 기사를 검색하고 나온 터라 고개를 끄덕였다.
서운해서 어쩌지요. 형님처럼 의지하고 지냈는데.
인사치레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심이었다. 남 영사는 화제를 바꾸며 민항구 공안국에는 다녀왔는지 물었다. 나는 영사관으로 한광수가 누군지 문의했던 기억이 났다.
김 실장 전화 받고 다음 날 칠레 영사관에서 전화가 왔어요. 자기네 시민권자인데, 한국계여서 가족을 찾는다고. 공조하자기에 그런 줄만 알고 갔지…….
남 영사는 잠시 말을 끊고 앞에 놓인 소주잔을 비웠다.
현장엘 갔는데, 중국 쪽에선 손도 대지 않았더라고. 그대로 떠넘긴 거야. 하긴 외국인이니까 자기들은 상관도 없겠지만. 들어갔는데 기가 막히더라고. 유서나 메모 같은 것은 없었고, 요금 독촉장이 잔뜩 쌓여 있더라고요. 냉장고를 열어 봤는데 아무것도 없어. 그런데 말이요. 양말에 손수건까지 각을 잡아 놓고 침대 밑에 실내화는 아침에 다시 신을 것처럼 벗어 놓았지 뭡니까. 구석에 여행 가방을 싸 놓았는데, ……섬뜩하더라고.
남 영사는 들었던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나는 종업원을 불러 소주를 한 병 더 달라고 했다. 좋은 데가 있다고, 함께 가자던 마리오가 웃는 모습이 떠올랐다. 기분이 자꾸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그때 전화기 진동으로 테이블이 떨렸다. 크라잉 클럽이 문을 열었다는 알림 문자였다. 전화기를 확인하고 남 영사에게 한 잔 더 해야죠, 하고 물었다. 우리는 밖으로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