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키코모리 10년 경력자의 일기
대구 사는 형네 부부와 김천 사는 부모님이 함께 KTX를 타고 어제 점심에 서울역에 도착했다. 호텔에서 하루 묵고 오늘 오전에 여유 있게 혼주 메이크업 받고 한다고 그랬다. 그 덕에 오래된 부부, 7개월 된 부부, 큰 누나, 나 이렇게 모여서 서울역 근처 샤브샤브 집에서 점심도 먹고 서울 구경도 하고 가족 시간을 가지고 헤어졌다.
나는 오늘 결혼식장에 일찍 가지 않았다. 40분 전에야 겨우 도착했다. 6남매 중 다섯 째인 나의 유일한 손아래 형제여서 무의식적으로 만만해서 그랬는지 학교 과제를 하다 시간 가는 줄 몰라서 그랬는지 그렇게 됐다. 아니면 서울에서 서울로 이동하는 결혼식은 처음이어서 시간 가늠에 실패했는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면 주말부터 이어져 온 약간의 의욕 저하의 영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야 뭐가 됐든 참 철이 없었다. 동생 결혼식은 아마 당분간 또 있지는 않을 텐데, 한 번 있는 이벤트에 너무 무신경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일은 '다음엔 그러지 말아야지.'가 안 되는 것이다. 대신 축의금을 많이 했다. 마음에 들지 어떨지 모를 선물 대신 현금이라는 느낌도 더해서.
친척들 중에 우리 집처럼 남매가 많은 집은 없지만 외갓집이 6녀 1남 7남매다 보니 이모도 많고 사촌 형제들이 많다. 온 친척들의 아픈 손가락이었을 수도 있고 깜깜하게 덮어져서 불분명하고 불안한 존재였을 수도 있던 나지만 결혼식장에 도착해서는 내가 먼저 더 사랑으로 반갑게 웃으며 당당하게 인사하고 포옹을 했다. 무자비하게 흘러간 세월 위에 피로 얽힌 추억을 함께 붙잡고 서있다는 연결감이 들어서 그랬고, 내가 서있는 위치보다도 더 높고 좁은 세월의 더미 위에 서있는 그분들을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없어서 자연스레 그렇게 됐다.
작년 10월에 형이 결혼할 때는 내가 축의대에 있느라 결혼식 참여를 못 했어서 이번엔 형이 축의금을 받았다. 형과 매형이 바빠 보여서 옆에 가서 기록을 돕고 있으니 다른 반가운 얼굴들도 많이 볼 수 있었다. 거의 20년 만에 동생의 교회 동갑내기 친구들을 보기도 했는데 그네들은 애기 때부터 작은 교회에서 나랑도 식구처럼 함께 자란 사이이기 때문에 더 각별하게 느껴졌다. 숙녀들이 된 겉모습과 표정에서 느껴지는 어른미에 내가 살지 않으려던 동안에도 동생과 그 친구들의 시간은 쉬지 않고 흘렀다는 것을 절감할 수 있었지만 예전처럼 위축되는 느낌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그 이유도 알 것 같다.
시간이 되어 예식장으로 들어갔다. 눈물이 나면 어쩌나 싶은 걱정이 무색하게 동생이 지나가며 인사할 때도, 식이 모두 진행되는 동안에도 그런 기분은 들지 않았다. 동생 부부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의 설교로 혼인 예배를 하고, 5년 연애 끝에 두 영혼이 하나가 되겠다는 의식을 치르는 그리 길지 않은 순간에 내 자취방의 보증금과 월세가 얼마인지를 묻는 사촌 동생에게 인간적인 거리감을 느끼느라 그랬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는 신혼집의 위치나 뷰를 이야기하며 제부의 벌이를 물어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동생 부부와 몇 년 전부터 종종 보는 사이지만 단 한 번도 여동생의 남자 친구가 얼마를 버는지 궁금했던 적이 없고 들은 적도 없어서 "잘 몰라."라고 했다. 다행히 형이 나보고 가족사진 촬영 전에 넥타이를 매라고 밖으로 불러서 나갔다가, 넥타이를 매고 다시 들어와서는 누나들이 있는 곳 뒤에 가서 남은 예식을 치를 수 있었다.
직계 가족 촬영까지 모두 마치고 가족들과 세 테이블에 모여서 식사를 했다. 부모님은 동생 부부와 함께 멀리서 오신 손님들에게 인사를 하러 다니셨고, 그래서 음식을 앞에 두면 나오는 엄마의 일련의 멘트들(비싸거나 자주 먹기 힘든 걸 많이 먹으라고 속삭이는 것, 방금 먹은 메뉴를 좀 먹어보라고 하는 것, 이거나 저것 좀 더 가져올까 하고 계속 묻는 것 등) 없이 쾌적하게 식사를 할 수 있어 좋았다. 엄마의 멘트도 그 자체로 가만히 듣고 있기 쉽지만은 않은 멘트지만, 그런 말들에 큰 누나나 셋째 누나는 그냥 가만히 "예" 하지 않고 꼭 한 마디씩 반응해서 말을 갖다 붙이기 때문에 괜히 번잡아지곤 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따로 식사를 하는 것에 더해 조카들도 많이 커서 일일이 따라다니지 않게 되니 여러모로 뷔페를 훨씬 수월하게 즐길 수 있었다.
하나 둘 떠나는 친척들에게 인사를 하고, 식당에 늦게 들어온 우리들 신부 직계 가족의 식사도 슬슬 끝이 났다. 이어서 계수까지 마쳤고, 엄마가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을 때 그제야 결혼식장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 결혼식장 입구 앞에서 헤어질 때 이제 한 번 안아보자며 하루 종일 바빴던 여동생을 처음 안아 주고선 "축하하고 잘 살고"라고 말을 했다. 내가 방심한 것을 알았는지 어디서 오는 것인지 통 모르겠는 뜨거운 것이 아무 전조도 없이 갑자기 나를 찾아왔다. 마음속으로 그 감정을 '흡'하고 들이마셔서 울지 않고 넘어갔지만 '그렇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친구 같기도 애인 같기도 하던 하나 뿐인 내 동생의 결혼.
셋째 누나의 주차권 문제로 큰 누나와 셋째 누나가 말을 좀 주고받으면서 마지막에 찝찝한 맛을 남겼지만 어찌 됐건 새로운 가정의 탄생을 축복하며 어느 팀은 서쪽으로, 어느 팀은 북쪽으로, 또 어느 팀은 남쪽으로, 각자의 가정의 보금자리가 있는 곳을 향해 뿔뿔이 흩어졌다. 나도 내 방으로 돌아와 길었던 연휴를 갈무리하는 차원에서 빨래, 청소, 설거지를 했다. 화장실에 향초를 피우고 이부자리도 다시 한번 정돈했다. 여동생이 결혼하면 괜히 저런 것들이 하고 싶어지기도 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