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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진 Oct 30. 2022

공포의 정리

지음이의 일기 2

지음이의 일기

날짜: 2021년 7월 25

날씨한 번만 뛰어도 땀이 나는 날

공포의 정리     

 우리 아빠는 참 무섭다

왜냐하면 아빠가 정리를 시작할 때 자기 물건을 정리하지 않으면 모두 쓰레기통으로 가기 때문이다

 오늘 서랍장 정리를 아빠가 시작했는데 내 소중한 돈이 모두 날아가 버릴 뻔했다그리고 뽑기를 해서 아주아주아주 운이 좋으면 뽑히는 하루 공부 PASS’를 잃어 버렸다너무 괴로워서 따지고 싶었다지금쯤 쓰레기봉투 맨 아래에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일주일 전에 아빠와 옷장 정리를 했는데 내 옷장에 옷이 4배쯤 줄어든 것 같았다너무 슬프다그래도 괜찮다왜냐하면사람은 깨끗하게 살아야 하니까



나도 남편의 정리가 무섭다. 

남편이 정리를 시작하면 우리 가족 모두는 바짝 긴장한다. 

남편이 서랍으로 가면 우르르 서랍으로 몰려가서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그의 손으로부터 보호하려고 실랑이를 벌인다.      

“아빠! 이 머리끈은 작년 내 생일에 친구가 직접 만들어서 선물한 머리끈이란 말이야. 절대 버리면 안 돼!”

“네 머리 지금 단발이잖아. 일 년 동안 안 쓰는 거 다 봤다. 버려라.”     

“아빠! 이거는 럭키박스에서 나온 마스크 팩인데, 나중에 엄마 생일 선물로 줄 거야. 버리지 마.”

“엄마는 피부가 예민해서 마스크팩 안 한다. 버려라”     

“여보~ 진짜 이건 버리지 마라. 나중에 쓴다. 여행가거나 어디 갈 때 필요하데이”

“작년에도 그렇게 말해서 안 버리고 뒀는데, 여행 갈 때 평소에 쓰던 거 써야 한다고 일회용 안 썼잖아. 그냥 버려”     

 우리는 그에게 이 물건을 왜 버리면 안 되는지 설득력 있게 설명을 해야 한다. 버벅거리거나 쓸데없는 이유를 말하면 가차 없이 그 물건은 쓰레기통 행이다.      

 그가 옷장으로 가면 우리는 우르르 옷장으로 몰려간다. 작은 옷들은 가차 없이 동네 어린 동생들에게 전해줄 상자로 들어간다. 

아이들은 철마다 자주 꺼내 입는 옷이 하나, 둘 있다. 문제는 10대는 폭풍 성장기라는 것이다. 좋아하는 옷을 오래 입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겠냐만은 금방 크는 키로 인해 2년 이상을 입지 못한다. 아이들은 철이 바뀔 때마다 아빠의 공포의 옷장 정리를 경험한다.      

 사실 우리집에 버려야 할 물건을 버리는 건 남편밖에 없다. 나, 아들, 딸 모두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다음에 사용할 것 같아서, 추억이 깃들어 있어서, 너무 예뻐서, 소중한 사람이 준 물건이라서 등등 많은 이유가 있다. 

 하지만, 남편의 정리가 없었다면 우리집은 지금 어떤 모습일지 상상만 해도 끔찍하긴 하다. 

 남편의 정리가 시작되면, 우리는 한편이 되어 지켜야 할 물건을 살리기 위해 서로를 변호해준다. 공포의 정리의 긍정적인 면이랄까?      

 사건의 시작은 이러했다. 우리의 똘똘 뭉침이 정리에 방해가 되었는지 남편은 우리가 다른 것을 하고 있을 때 몰래 서랍 정리를 시작했다. 우리집 아이들이 매일 해야 될 공부를 하면 3일에 한 번 뽑기를 할 수 있다. 이 뽑기는 추억의 뽑기처럼 종이로 된걸 뽑아 적혀있는 등수대로 상품을 받는다. 꽤 높은 등수 상품 중 하나가 바로 ‘하루 공부 패스’권이다. 은율(딸)이는 하루 공부 패스권이 나오면 그날 바로 사용해버리지만, 지음이는 안쓰고 모으고 또 모았다. 나중에 정말 공부를 하기 싫을 때 쓴다며... 그렇게 힘들게 모은 ‘하루 공부 패스권’이 든 상자를 남편이 서랍 정리를 하면서 쓰레기통에 탈탈 털어서 버린 것이다. 바로 그 장면을 지음이가 지나가다가 봤다. 순간 정적이 흘렀다. 지음이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아빠는 당황하며 쓰레기통을 뒤져 몇 장을 찾아주었지만, 지음이는 세어보더니 몇 장이 없다고 난리였다. 남편이 정리할 때 사용하는 쓰레기 종량제 봉투는 50리터다. 큰 용량의 봉투의 쓰레기를 다 꺼내 찾을 수 없었다. 지음이는 조용히 방에 가서 분노의 일기 쓰기를 시작했던 것이다. 정말 속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일기의 마무리를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그래도 괜찮다. 왜냐하면, 사람은 깨끗하게 살아야 하니까.”     

부모의 실수를 용서할 수 있을 만큼 넓은 마음을 가진 아들. 

정말 정말 소중한 물건을 잃어버렸지만, 더 소중한 사람을 세워주는 아들.     

 오늘도 나는 아이에게서 배운다. 슬퍼 울고불고하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아이는 활기가 넘친다. 순간적으로 감정이 폭발할 때도 있지만 그 감정을 스스로 추스르고 원한을 품지 않는다. 때로는 깜짝 놀랄 만큼 지난 일을 잊고 재빨리 기분을 푼다. 그리고 앞으로 일어날 모든 일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너그러이 대한다.      

나도 지음이처럼 나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래도 괜찮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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