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들도 어디론가 떠나고 빛바랜 단풍잎도 삭풍에 떨어져 헐벗고 앙상한 나무가 서로 의지하고 있는 숲 속은 유난히 고요하다.
하지만 눈이 내린 숲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겨울 숲을 찾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무엇보다 겨울 산을 반영해 무채색의 향연을 펼치는 호수까지 품고 있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
이런 길은 함께 걸어도 좋고 혼자 걸어도 좋다. 전북 부안 내변산~내소사가 바로 이런 길이다.
트레킹을 떠나기 전날 함박눈이 내리자 한편으론 걱정했고 한편으론 환호했다.
눈은 겨울 산의 꽃이다. 눈 없는 겨울 숲은 황량하고 삭막해서 마음까지 헛헛하게 한다. 새벽에 기상하니 눈은 그쳤지만 마음은 벌써 내변산에 가있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과 토스토 한쪽을 게 눈 감추듯 해치우고 아이젠과 스패치를 배낭에 챙긴 뒤 지체 없이 떠났다.
(산상 호수인 직소보 전경)
3면의 바다에 접한 내변산(해발 509m)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변산반도의 중심에 우뚝 솟아 서해바다를 마주하고 있는 조선 8경 중의 한 곳이다.
내변산 탐방센터에 도착하니 아침 바람은 차고 간간히 눈발이 날렸다. 청정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출발해 봉래구곡을 거쳐 직소보에 다다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산속에서 보기 힘들 만큼 규모도 컸지만 산과 조화를 이룬 이국적인 풍경이 놀라웠다. 직소보는 대소골을 발원으로 ‘직소폭포’와 ‘선녀탕’을 거쳐 모인 곳으로 1991년 부안댐이 건설되기 전에 부안군의 비상식수원으로 만들어진 인공폭포다.
직소보의 데칼코마니 풍경은 일품이다. 눈에 살짝 덮인 산상 호수에 비친 산봉우리에 한참 동안 눈을 떼지 못했다. 거센 눈발은 수은주가 올라간 한 낮엔 진눈깨비로 변해 바람에 흩날리면서 산 중턱엔 운무가 살포시 내려앉았다. 그리고 숲 속 앙상한 소나무 가지엔 눈을 맞으며 밤새 연인을 기다리는 여인처럼 눈송이가 걸려있었다.
‘눈 내린 겨울날이면
내리는 눈을 맞으며
눈 내린 숲 속에 한그루 나무가 되어
그대를 기다린다고 하네요 ‘
안도현의 시 ‘겨울 숲’이 떠오르는 풍경이다.
(관음봉으로 올라가는 거칠고 험한 바위길)
마치 먹을 갈아 만든 듯 칠흑처럼 짙고 잔잔한 호수에 산과 하늘의 풍경이 거울처럼 비추고 있었다. 담백한 겨울 내변산을 ‘수묵화’ 같다고 표현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산허리를 끼고도는 잔도 같은 데크길을 걸으며 산상 호수를 감상하다가 호젓한 오솔길에서 뽀도독뽀도독 눈 밟는 소리를 걷다 보면 재백이 고개가 등장한다. 이곳에서 잠시 주위 풍경을 감상하며 보은병에 담아 온 따뜻한 물을 마셨다. 온몸에 온기가 돌았다.
이곳에서 관음봉으로 올라가는 바위 길은 로프를 잡고 올라가야 할 만큼 가파른 데다 눈까지 내려 미끄러웠다. 앞서가던 여성 등산객들의 올라가는 모습이 아슬아슬 위태로워 보였지만 표정을 보니 스릴을 즐기는 것 같았다.
(관음봉 정상에서 내려다본 내소사 전경)
관음봉 정상에서 파노라마 뷰를 보며 한 숨을 돌렸다. 눈 내린 끝이라 그런지 하늘은 뿌연 안개가 자욱했다. 가파르지 않은 완만한 산길을 따라 천천히 산 중턱으로 내려오자 눈이 하얗게 내려앉은 내소사 대웅보전, 봉래루, 설설당 등 가지런히 서있는 건물과 요사채가 마치 미니어처처럼 보였다.
백제 무왕 34년 혜구두타가 창건한 천년고찰 내소사 대웅보전은 못을 하나도 쓰지 않고 나무토막들을 깎아 끼워 맞춘 건물로 유명하다. 여기에 정면 8칸 8짝의 문살을 장식한 꽃무늬는 지금은 색이 바래 이젠 나뭇결로만 남았지만 여전히 화사한 꽃밭 같다.
(내소사 경내)
그래도 내 마음을 더 사로잡는 것은 600m에 달하는 전나무숲길이다. 이 숲길은 수령이 수백 년 된 전나무 500그루가 터널을 이루고 있어 그저 걷기만 해도 마음이 정갈해진다. 그 숲길은 사람의 손을 거쳐 태어났지만 세월이 흘러 자연에 동화된 듯하다. 아마도 그 숲길의 황홀한 설경에 매료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코스 / 내변산탐방센터 ~봉래구곡~직소보~관음봉~내소사(8km)
*tip / 가을 단풍시즌에 걸어도 좋지만 설경을 볼 수 있는 겨울도 깊은 인상을 주는 코스다. 다만 관음봉에 올라갈 땐 미끄러지지 않도록 안전에 각별히 유념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