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닷길을 걷는 다면 겨울

충남 태안 해변길 5코스 노을길

by 박상준

겨울과 바다는 썩 어울리는 조합은 아니다.

어떤 수식어를 붙여도 바다는 다른 계절보다 여름에 돋보인다.

눈부시게 밝고 작열하는 태양을 가득 품은 여름바다를 연상하면 맨발로 뜨겁게 달궈진 모래사장을 밟지 않아도 가슴속에서 열기가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청춘들은 그 열기를 식히기 위해 숲이나 계곡보다 바다로 뛰어든다.

그렇다고 바닷물이 특별히 차가운 것은 아니지만 여름해변에서 벌거벗은 청춘들은

가슴을 확 트이게 하는 수평선을 바라보며 거친 파도와 싸울 수 있다.

일몰(日沒)이 올 때까지 파도와 씨름하고도 날이 저물면 모닥불을 피워놓고 둘러앉아 노래를 부른다.

그래서 같은 바다라도 젊음을 상징하는 여름바다는 즉물적(卽物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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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쌓인 삼봉탐방센터 앞 해변을 걷는 탐방객들)


하지만 겨울바다는 사유적(思惟的)이다.

여름바다를 쓴 시는 찾아보기 힘들지만 겨울바다를 소재로 한 시는 차고 넘친다.

겨울바다는 시인들을 감상에 젖게 하고 고뇌하게 하는 마력이 있다.

어디 시인뿐일까.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적막하고 을씨년스러운 바다는 지나간 인생을 관조(觀照)하고 사색하게 만든다.

시인 양병우는 '겨울바다를 가는 것은 바로 나를 만나러 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시린 바닷바람 가슴 가득히 마셔 / 나를 씻어내고 싶어 가는 것이다'라고 했다.

하여 겨울바다는 그저 놀러 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비우거나 생각을 채우러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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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송 숲에서 바라본 두여 해변)


태안 해변길 5코스 노을길에서 진짜 겨울바다를 만났다.

하지만 바닷바람이 마음을 시리게 하진 않았다.

기상청은 전날부터 '최강 추위'라고 요란을 떨었지만 바다엔 바람이 미동(微動)도 안 했다. 외려 스산하고 황량해야 할 해변은 고요하긴 했지만 맑고 쾌청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드르니항에서 하차해 들머리인 백사장항을 거쳐 삼송탐방센터를 벗어나자 바다보다 하늘에 먼저 눈이 갔다.

이곳엔 도시인들을 괴롭히던 미세먼지가 감쪽같이 자취를 감췄다.

시야를 시원하게 하고 공기가 상큼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이번엔 해변을 보았다. 절반은 새벽에 쏟아진 눈이 하얀 융단처럼 덮여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하얀 캠퍼스 위에 장난기 가득한 회원들이 그림처럼 발자국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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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길은 연미한 바다 풍경처럼 ‘꽃지’ ‘밧개’ 어은돌‘, ’ 바람아래 해수욕장‘, ’ 곰섬‘ ’ 두여 해변‘등 지나치는 곳 하나하나 이름도 고왔다.

'꽃지'는 '해당화가 천지에 피는 곳'에서 유래됐다.

'밧개'는 소금인 자염을 굽던터가 있어서 불리어졌다고 한다.

두여 해변은 까만 바위가 다채로운 무늬를 형성해 신비한 풍경을 보여준다, '여'란 밀물 때 물속에 잠기는 바위를 의미하는 순우리말이라고 한다.

전국 각지의 트레킹 코스를 대상으로 아름다운 이름 콘테스트를 한다면 태안 해변길이 '대상'을 차지하지 않을까. 겨울바다에선 각별한 감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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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조로 유명한 꽃지 해변의 할아비 바위와 할미바위)


겨울바다는 누구나 올 수 있지만 그 길은 아무나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설령 걷는다 해도 서늘한 길에서 희열을 느끼려면 자연과의 교감이 있어야 한다.

일행과 잠시 떨어져 눈이 포근하게 쌓인 곰솔군락 사이를 홀로 걸으며 햇볕이 쏟아지는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면서 함께 감상할 동반자가 없다는 것이 그렇게 아쉬울 수가 없었다.

단단한 모래에 바닷물이 살짝 덮어 마치 거울처럼 반사되는 밧개 해변은 또 어떤가.

무엇보다 두여 전망대에서 바라본 파노라마 전망은 해변길의 백미(白眉)라고 불러도 되겠다.

겨울바다는 한적해서 좋고 풍정(風情)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어 좋다.

혈기 방장한 젊은이들에겐 보이지 않는 비경이 노을길 곳곳에 숨어있다.

바닷길을 걷는다면 겨울이다.


*코스 / 백사장항~삼봉탐방센터~두여 해변~방포~꽃지해수욕장(11.8km)


*tip /꽃지해수욕장은 저녁노을이 아름다운 길이라 탐방객들이 송년에 많이 찾는다. 겨울에 이 길을 걷는다면 오후에 출발하는 것을 추천한다. 트레킹을 마치고 꽃지해수욕장에서 바라보는 황금빛 노을은 깊은 울림을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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