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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상준 Mar 13. 2023

몽환적이고 탈일상적인 길

전남 순천 순천만 남파랑길 61코스


순천만은 바람마저 설레임을 준다. 바람속에는 산줄기 저편에 바다가 있다는 것을 알리는 비릿한 내음과 소금기만 녹아있는 것이 아니다. 짙은 안개도 순천만을 알리는 시그널이다.


봄볕이 유순한 3월의 주말 우린 순천만을 걸으러 '무진기행'의 고장, 순천 벌량화포에 다녀왔다. 내륙에서 내려오는 동천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순천만이 있다. 


순천만의 한쪽 꼭지점에 있는 별량화포에 도착해 버스가 도착하자 가장 먼저 맞이한 것은 말끔하게 단장된 포구와 앞을 가늠할 수 없는 해무(海霧)였다. 안개속에 잠긴 포구에서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그의 고향이 순천이다.



우리가 걸어 가야할 곳은 U자형 코스를 뒤집은 순천만의 반대편 끝자락 와온해변. 공식명칭은 ‘남파랑길 61코스’의 날머리지만 우린 역방향을 선택해 별량화포를 들머리로 삼았다. 근데 화포는 이날 아침부터 안개가 점령했다. 바다에 옅은 투명장막이 쳐진것처럼 시야가 흐릿했다. 몽환적이었다. '무진기행'이 왜 순천이 배경인지 알겠다.


 하긴 박찬욱감독의 ‘헤어진 이유’의 ‘이포’도 실제 존재한다면 순천일 것이다. 영화의 주제곡, 정훈희와 송창식이 부른 ‘안개’의 애조띤 멜로디는 순천을 닮았다. 순천만은 시적인 감성이 풍부한 안개의 고장이다. 그 곳은 김승옥의 감수성을 길러낸 비옥한 토양이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안개로 가득한 바다는 왠지 불투명하고 답답하지만 이 때문에 눈 앞에 있는 것보다 그 너머의 무엇인가에 대한 기대감을 증폭시킨다. 그 기대감을 한가득 안고 안개속을 헤치며 와온을 향해 출발했다. 길의 오른쪽 갈대밭과 내내 동행했다.


‘갈대와 갯벌, 철새’는 순천만을 상징한다. 김승옥은 소설속 음악교사 '인숙'의 입을 통해 순천의 바다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수심이 얕은데다 그런 얕은 바다를 몇백리나 밖으로 나가야만 비로소 수평선이 보이는 진짜 바다다운 바다가 나오는 곳이니까요” 그럴수 밖에 없다. 순천만의 수평선은 갈대밭과 갯벌 너머에 숨어있다. 그래서 뭍에서는 수평선이 보이지 않는다. 



화포와 순천만국가정원 입구까지는 온통 금빛 갈대숲이다. 그것도 드문드문 떨어져 있거나 성기게 군락을 이룬 여느 갈대숲과는 달리 사람의 키보다 훨씬 더 웃자란 갈대들이 빽빽히 뿌리를 내린 갈대숲은 해무에 잠겨 서정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그래서 갈대숲은 바다속의 바다다. 갯바람에 갈대가 춤추는 풍경은 망망대해에 일렁이는 잔물결처럼 매혹적이다. 뿐만 아니라 갈대숲 위에는 철새들이 나그네를 반기듯 떼를 지어 하늘을 순회한다. 흑두루미, 노랑부리 저어새, 검은머리 물떼새 등은 매년 겨울 따뜻한 순천만에서 월동한다.



금빛 갈대숲과 철새 그리고 안개는 김승옥에게 유년시절의 잔상처럼 남았을 터다. 그는 이 곳을 배경으로 '감수성의 혁명'을 일으켰다는 평을 듣는 한국 단편소설의 백미(白眉) '무진기행'을 썼을만큼 강렬한 인상을 준 풍광이다. 


작품속 주인공인 '윤희중'은 자신과 함께 무진을 떠나고 싶어하는 '인숙'과 안개가 자욱한 갈대숲을 걸었다. 짧은 인연은 갈대처럼 마음이 흔들리다 이별을 맞는다. 그 길에서 오로지 금빛 갈대숲으로만 이뤄진 단조로운 길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이 코스의 중간쯤에 위치한 국가정원과 용산전망대는 건너뛰었다. 2023국제정원박람회 때문에 3월말까지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아쉬움이 컸지만 국가정원은 그저 61코중 한부분일 뿐이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에 둘러쌓인 남해 여자만(汝自灣)에 속해있는 순천만의 진가는 풀코스를 걷지 않으면 모른다.



벌량화포에서 순천만정원까지가 갈대의 향연이 펼쳐지는 곳이라면 용산전망대에서 와온까지는 ‘갯벌 맛집’이다. 갯벌은 해양 생태계에서 가장 생산성이 높은 공간으로 생태계의 보고다. 이 코스를 지나다보면 바지락, 새우, 게 뿐만 아니라 짱뚱어가 뻘속에서 뛰어놀고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하지만 나그네에게 순천만 갯벌은 경관적 가치가 돋보이는 곳이다. 모노톤의 광활한 수묵화가 봄햇살에 반사돼 시 적인 감흥을 일으킨다. 갯벌에 설치돼 물이 들어오면 물에 잠기는 노도길 끝 짱뚱어와 꼬막 작업장은 마치 갯벌에 설치된 조형물처럼 독특한 정취를 자아냈다. 그래서 이곳을 찍은 사진은 이색적인 바다를 그리워하는 청춘들을 유인한다.



이 코스의 대단원은 퇴계 이황이 끔찍이 사랑했던 백매화가 장식했다. 퇴계는 임종 직전까지 매화 물주기를 걱정할 정도로 아꼈다.  안개가 희미한 남쪽바다에 접한 와온 소공원의 백매화 군락은 솔섬과 조화를 이루며 순천만 풍경을 화사하고 생동감있게 장식했다.


 이날 13km를 걸었다. 와온해변에 도착하자 안개는 거의 걷혔다. 기대했던 아니 기대이상이 순천만 모든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스쳐지나갔다. 순천만엔 국가정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소설속 안개로 뒤덮인 '무진'은 몽황적이고 탈일상적인 공간을 의미한다. 김승옥과 다른의미에서 순천만은 내게 그런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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