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하러 가는 길에 만난 고추밭
운동하러 가는 동네 골목길에서 빨갛게 익은 고추밭과 노란 컨테이너 박스가 눈길을 끌었다.
가을이라지만 이 더위에 누가 고추를 따는지 내 호기심을 자극했다. 밭에는 계절을 잊은 듯 붉고 푸른 고추가 주렁주렁 한창이다. 시기상 마른 고춧대에 끝물 고추가 서너 개 달려 있어야 맞는데 말이다.
새벽부터 땄는지 이미 컨테이너 박스에는 빨간 고추가 가득 담겨 있었다.
사진을 좀 찍어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주위를 둘러보다가 딴 고추를 들고 나오는 외국인 근로자와 눈이 마주쳤다. 사진을 찍어도 되냐는 내 물음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고추밭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당황스러웠지만 얼른 사진 몇 장을 찍고 밖으로 나왔다.
시골에서 자란 덕분에 무더운 여름이면 고추 밭에서 고추를 따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
고추가 빨갛게 익으면 아버지는 주말을 이용해 고추 따기를 시키셨다. 늦잠도 미루고 아침밥을 먹는 둥 마는 둥 밀짚모자와 팔 토시를 하고 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가야 했다. 빼곡히 들어 찬 고추밭엔 울긋불긋 고추가 익어가고 아버지는 따야 할 고추 고랑을 지정해 주셨다.
오빠는 다섯 줄, 나는 세 줄.
누가 먼저 고추를 따는지 내기를 하자는 오빠, 지는 사람은 이긴 사람이 딴 고추까지 마당으로 가져다 널어야 한다.
길기만 한 고추 밭고랑은 빨간 고추를 따도 따도 제자리걸음이다. 앞서 나가는 오빠 뒤꽁무니를 허리 펴기도 참아가며 열심히 쫓아 가지만,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오빠가 고추밭 한 고랑을 다 따고 쉬는 틈에 앞질러도 보지만 그것도 잠시뿐 손이 빠른 오빠를 이길 수는 없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 허리를 연신 숙였다 폈다 고추를 따는 일은 힘든 농사 일이다. 땀은 쉴 사이 없이 흐르고 땀냄새 때문에 모기는 날아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나무마다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 달리면 좋은 일이지만 철부지였던 그때는 붉은 고추가 야속하기만 했다. 앞으로 나아가 빨리 오빠를 이겨야 하는데 따도 따도 줄지 않는 붉은 고추가 내 앞길을 막아서는 것 같았다.
고추를 따다가 지치면 오빠와의 내기도 그만두고 흙장난을 하기도 했다.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땅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놀면서 힘들다고 투덜거리면 엄마가 나서서 그만 따라고 하셨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보시곤 그만 들어가서 시원한 미숫가루나 타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다. 그럼 아버지도 더는 고추 따는 일을 시키지 않으셨다.
지금도 빨간 고추를 마당 한가득 펼쳐 널어놓고 나서 마시던 얼음 동동 달달한 미숫가루 맛이 그립다.
그 시절 일요일이면 집집마다 온 식구가 밭에서 고추 따던 정겨운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운 옛 모습이 되어버렸다. 밭에서 고추 따며 숙제를 했는지 물었던 반친구도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