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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루밍 프로젝트(2)

정신적 재건

by 홍시

정신적 재건을 위해 내가 주로 한 일은 바로 ‘일기 쓰기’였다. 일기를 쓰지 않고 생각만 할 수도 있지만 생각은 글쓰기보다 휘발성이 좋아서 내 생각과 감정을 잠시나마 붙잡아두고 헤아려보려면 생각보다는 글쓰기가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개적인 sns에 글을 적게 되면 내 생각과 감정에 대해 솔직하게 쓰기 어려울 것 같아서 나는 ‘일기 쓰기’ 전용 비공개 카페를 개설했다. 내 카페에는 총 세 개의 게시판이 있다.




감사&칭찬일기

감정일기

그냥일기



일기라고 하면 초등학생 때, 개학 전 글자수 채우기에 급급했던 일기장이 생각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쓰기를 권하는 일기는 출퇴근길, 엘리베이터, 화장실에서 쓸 수 있을 정도로 간단하고 짧게 써도 괜찮다. 굳이 필요없는 내용으로 글자수 채우기를 하지 않아도 되는, 나만 보는 일기다. 이제 각 일기에 내가 어떤 내용들을 채우는지 설명해 보겠다.




감사&칭찬일기

감정일기나 그냥일기는 언제 쓰든 상관없지만 감사&칭찬일기는 되도록 눈을 떴을 때, 출근길 같은 하루 일과를 시작하기 전에 쓰라고 권하고 싶다. 일과 시작 전 감사&칭찬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다. 당장 방금 눈을 떴는데 감사할 일이 뭐가 있지? 칭찬할 일이 뭐가 있지? 싶을 수도 있다. (사실 그래서 감사일기와 칭찬일기를 합쳐 쓰는 것도 있다ㅎ) 하지만 주변을 세심히 둘러보면 생각보다 세상에는 감사하고 칭찬할만한 게 많다.


천재지변이 일어나 아침에 눈을 못 뜰 수도 있는데 아침에 가족과 무탈하게 하루를 맞이한 것,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옷차림을 입고 집에서 나온 것, 운 좋게 대중교통에서 앉아가는 것, 사무실에 내가 제일 먼저 도착해서 잠시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것. 모두 따지고 보면 작지만 감사한 일들이다.


칭찬할만한 일 또한 찾아보면 무궁무진하다. 출근하기 싫은데도 부지런히 준비해서 정시 출근한 것, 가족들에게 다정한 아침인사를 건네고 집을 나선 것, 내가 입고 싶은 코디를 입고 출근한 것, 업무 전 사무실을 환기하고 정돈한 것 등 내가 나를 칭찬해주고 싶은 일들은 마음만 먹으면 몇 개고 찾아낼 수 있다.


별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걸 찾아내서 매일매일 기록으로 남기는 것만으로도 하루를 더 기분 좋게 시작할 수 있다. 감사할 일들과 칭찬할 일들은 하루 일과 중에도 소소하게 계속 쌓이므로 나는 퇴근길에 한번, 자기 전에도 한번 업데이트를 해주고 있다. 감사&칭찬일기가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은근히 복리 효과를 내주는 기분 좋은 아침 시작의 원천이다.




감정일기

일기를 써야겠다고 생각한 주목적이다. 나는 잘 당황하고 순발력이 좋지 않기 때문에 셀프토크를 내 스타일로 체득하기까지 시간이 꽤 오래 걸렸다. 지금도 대화 상황에서 셀프토크를 한다기보다는 주의를 다른 데로 잠시 돌리거나 다른 데에 집중했다가 혼자 남겨졌을 때 셀프토크를 하는 것에 가깝다. 퇴근길 혹은 잠자기 전에 셀프토크를 하던 나는 아예 나만의 셀프토크 템플릿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렇게 찾아낸 게 감정일기를 쓰는 거였다. 감정일기는 이미 유명한 심리치료 방법이라 템플릿이 다양했는데 나는 상담사 선생님께서 말씀해 주신 셀프토크 기틀을 기반으로 나만의 감정일기 템플릿을 만들었다. 분류는 아래와 같이 나눴다.




(1) 상황 : 어떤 상황이었는지.

(2) 생각 :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3) 감정 : 그 상황에서 내가 어떤 감정이 들었는지.

(4) 왜 그렇게 느낄까? : 그 상황에서 내가 왜 그렇게 느꼈는지. 왜?라는 질문을 꼬리에 꼬리를 물며 계속해야 근본적인 생각, 감정, 신념에 도달할 수 있음.

(5) 인정하기 : 내 감정을 부정하지 말고 인정하고 헤아려주기. 충분히 그럴만했다고 격려해 주기.

(6) 홍조가 왔을 때는 홍조의 정도(10점 만점 중 몇 점인지)와 홍조가 왜 왔을까? 하는 질문도 추가한다.

(7) 좌절된 욕구 찾기 : 어떤 욕구가 좌절됐기 때문에 그런 감정이 들었을까? 그 욕구를 충족시켜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8) 칭찬하기 :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찬할 부분이 있었다면 칭찬해 주기

(9) 인지왜곡 : 내가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부분은 없는지 점검하기




(6)~(9)까지의 항목은 해당사항이 없으면 스킵해도 무방하다. 감정일기는 내가 불안하고 당황스럽고 불편한 상황이 벌어졌을 때도 썼지만 내가 편하고 즐겁고 만족스러운 감정을 느낄 때도 썼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 행복한지를 알아야 그 상황에 나를 더 자주 노출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개 감정일기의 주제는 회사생활이 되었고 회사생활이 행복한 일은 거의 없으니 보통은 긴장, 불안, 당황, 분노, 짜증 등이 내 감정일기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위에서 일기를 짧게 쓰기를 권장했지만 생각보다 감정일기는 쓰다 보면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 처음에는 감정일기를 쓰는데 매일 2~3시간 정도의 시간을 할애했다. 그때는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왜 느끼는지에 대해서 탐구하는 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다. 하지만 감정일기를 반복해서 쓰다 보니 내가 어떤 포인트에서 자주 긁히고(?) 그 감정을 왜 느끼는지에 대한 패턴을 어느 정도 파악하게 되어 일기 쓰는 게 갈수록 수월해졌다.


물론 그 앙금을 말끔히 풀어내는 것은 아직까지 미지수로 남아있지만 매일 감정일기를 쓰는 것만으로도 회사생활의 스트레스가 상당 부분 해소된다. 그때는 감정에 매몰되어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던 상황들도 시간이 지나고 차분히 글로 적고 나면 내가 너무 오버했나? 감정적으로 생각했나?라는 후회가 들기도 하고, 다음에는 조금 더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를 준다.




그냥일기

그냥 일기는 말 그대로 그냥 일기다. 공개적인 sns를 아무것도 안 하는 나는 하루가 너무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느껴져서 쓰기 시작했다. 감사&칭찬일기, 감정일기를 제외하고도 내가 하루를 지내면서 느끼는 감상에 대해 간단하게 적는다. 인스타나 X와 같은 sns에 올릴 법한 글을 비공개 카페에 적는다고 생각하면 된다. 비공개라서 감상을 허심탄회하게 적을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일기를 쓰려고 마음을 먹고 나면 예전에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쳤던 것들이 주의 깊게 보이기 시작한다. 출퇴근길 우거진 나무의 예쁜 풍경, 맑은 하늘 위에 떠다니는 구름 모양, 맛있는 음식, 귀여운 소품, 길고양이들. 예전에는 경외심을 갖고 보지 않던 것들이다. 일상 속 자연에서 경외감을 갖기 시작하니 사람에게도 경외감을 느끼게 되고, 예전보다 내 주변, 사람들을 조금 더 존중할 수 있게 된 것 같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 대한 존중은 나에 대한 존중으로도 이어져 나의 우울과 불안을 조금 더 누그러지게 해주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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